中·日 용병부터 바둑여제까지 출전… 빅매치 펼치는 ‘여바리’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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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 ‘한국여자바둑리그’ 5가지 관전 포인트
국내 최대 여자 바둑대회 개막… 연고지팀 응원하며 분위기 ‘후끈’
용병 기대주 후지사와-우이밍 참가… 김은지-최정 등 국가대표급도 출전
‘미리보는 항저우 아시아경기’ 평가

7일 열린 한국여자바둑리그 1라운드 2경기에서 보령 머드의 최정 9단(왼쪽)과 H2 DREAM 삼척의 조혜연이 9단이 대결하는 모습. 이날 최 9단을 상대로 장고 끝에 백 불계승을 거뒀다. 조 9단은 1997년 입단해 2000년대 국내 여자 바둑의 성장을 이끈 주역 중 한 명이다. 한국기원 제공
7일 열린 한국여자바둑리그 1라운드 2경기에서 보령 머드의 최정 9단(왼쪽)과 H2 DREAM 삼척의 조혜연이 9단이 대결하는 모습. 이날 최 9단을 상대로 장고 끝에 백 불계승을 거뒀다. 조 9단은 1997년 입단해 2000년대 국내 여자 바둑의 성장을 이끈 주역 중 한 명이다. 한국기원 제공
초읽기 접전, 바둑판을 응시하던 입단 2년 차 막내의 표정은 시종일관 침착했다. 상대는 입단 25년 차 중견 선수. 9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린 한국여자바둑리그(여바리) 1라운드 4경기에서 여수세계섬박람회 4지명 이나경 초단(15)은 백돌을 쥐고 포항 포스코퓨처엠 주장 김혜민 9단(37)을 꺾었다. 패기에 찬 수읽기와 신예답지 않은 안정된 운영으로 백 반집 승을 거둔 것. 한국기원 소속 최연소 여자 기사인 이 초단에게 이번 경기는 주장 김은지 5단 대타로 뛴 데뷔전이었다. 그는 경기가 끝난 뒤 “막상 시작하니 떨리지 않았다”고 덤덤히 말했다.

최정상 여자 바둑 선수들이 맞붙는 여바리가 6일 개막했다. 올해로 9회째를 맞은 이 대회는 8개 팀이 3판 다승제, 14라운드 더블리그로 5개월간 정규리그를 이어간다. 2015년 대회 출범 이래 매년 새로운 팀이 챔피언에 올라 2번 이상 우승한 팀이 전무한 만큼 이번 시즌 우승 팀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바둑의 룰을 잘 알지 못해도 여바리를 즐길 수 있는 관전 포인트 5가지를 알아본다.

국내 최대 규모

여바리는 국내에서 열리는 여자 바둑대회 중 최대 규모로 꼽힌다. 바둑기전은 상금과 대국료 등 예산에 따라 대회 규모가 평가된다. 여바리는 우승 팀에 5500만 원, 준우승 팀에 3500만 원의 상금이 주어지며 대국마다 승자(130만 원)와 패자(40만 원)에게 대국료가 지급된다. 현존하는 국내 여자 기전 중 가장 오래된 ‘여자국수전’ 등이 개인 토너먼트 방식인 것과 달리 총 168대국에 걸친 팀 리그전인 만큼 예산이 최대 수준이다. 프로여자국수전은 우승자에게 2500만 원, 준우승자에게 1000만 원을 지급하며 별도 대국료는 없다.

2012년 국제바둑학회가 발간한 ‘현대 한국 여성 바둑의 발전 과정’(조선오·남치형 저)에 따르면 국내 최초 여자 기전은 1963년에 열린 여류왕위전이다. 그러나 단 1회 개최에 그쳤다. 이후 여자 기전은 1990년대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기까지 오랜 부침을 겪었다. 미미했던 관심은 2000년 동아일보가 주최한 43기 국수전을 통해 증폭됐다. 당대 ‘철녀(鐵女)’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맹활약한 중국 여자 기사 루이나이웨이 9단이 세계적인 바둑 스타 조훈현 9단을 꺾고 우승하며 세간의 이목을 모은 것. 이후 박지은 조혜연 김채영 김혜민 등 스타급 선수들이 나타나면서 여성 바둑은 성장을 이뤘다.

이광순 한국여성바둑연맹 회장은 “과거 여자가 전문적으로 바둑을 두는 것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잡혀 있지 않았고, 2010년대가 돼서야 여성 프로 기사들이 국제무대에서 본격 활약하기 시작했다”며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영향으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전국 31개 여성연맹 지부 중 21곳에 입문반이 신설됐다”고 말했다.

외국인 용병 제도 부활

올해 여바리에선 팬데믹 여파로 중단됐던 외국인 선수 제도가 4년 만에 부활했다. 팀마다 자율적으로 외국인 선수를 1명씩 영입하는 제도다. 김은지 한국기원 기전운영팀장은 “국가별 최정상급 기사들이 맞붙는 경기를 벌임으로써 국내외 팬들의 이목을 모을 수 있다”며 “대회를 국제 규모로 키워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올 시즌 여바리 1라운드 평균 시청률은 0.15%로 외국인 용병이 불참한 지난해(0.12%) 대비 소폭 상승했다. 2004년 시작된 한국바둑리그는 출범 19년 만인 지난 시즌에야 대만, 일본 등 해외팀이 국가 명의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번 여바리는 9월부터 열리는 항저우 아시아경기에 참가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출전하면서 ‘미리 보는 아시아경기’로도 불린다. 부안 새만금잼버리에는 일본 여자바둑의 최강자 후지사와 리나 6단이 합류했다. 입단 4년 차이던 2014년, 일본 여자바둑대회에서 사상 최연소(15세 9개월)로 우승을 거머쥔 선수다. 항저우 아시아경기의 일본 국가대표 선수로도 활약할 예정이다. 아시아경기에 중국 대표로 참가하는 기대주 우이밍 5단은 서울 부광약품 선수로 발탁됐다. 우이밍 5단, 김은지 5단과 함께 한중일 신예로 꼽히는 일본 나카무라 스미레 3단은 순천만국가정원 선수로 지명됐다.

후지사와 6단은 “한국에서 대면 대국 할 날을 오랫동안 기다렸다”며 “아직 팀 단위 여자 기전이 없는 일본과 달리 동료들과 서로 격려하며 성장할 수 있어 좋은 경험”이라고 참가 소감을 밝혔다.

연고지 강조된 ‘내 고장 내팀’

다른 기전에 비해 야구 등 대형 스포츠처럼 팀마다 연고지가 강조돼 응원의 재미도 크다. 팀 이름은 시(市), 군(郡)명을 기본 범위로 지어진다. 기업이 아닌 지방자치단체가 이끄는 팀은 서귀포 칠십리, H2 DREAM 삼척, 보령 머드, 순천만국가정원, 부안 새만금잼버리, 여수세계섬박람회 등 6개다. 보령 머드의 최정, 여수세계섬박람회의 이나경 선수는 실제 지역연고 선수로 출전한다. 지역투어 라운드에선 지역 팬들이 직접 참관하며 응원할 수 있다.

이는 팀 스토리텔링을 통해 대중 흥미를 자극하려는 전략이다. 한국바둑리그는 지역연고를 일찍이 앞세우지 않아 흥행 몰이에 실패했단 평가를 받는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국민 취미로 꼽혔던 바둑은 오늘날 인기가 급감하며 흥행이 관건인 처지가 됐다. 갤럽이 지난해 상반기 만 13세 이상 한국인 515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1년 이내 바둑을 경험한’ 한국인은 6%에 그쳤다. 국내 대학 단 2곳에 남아 있는 바둑학과 가운데 명지대는 최근 폐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바둑 여제’ 최정 9단 참전

‘바둑 여제’ 최정 9단의 여바리 통산 100승 돌파 시점도 관전 포인트다. 현재 96승(13패)을 기록 중인 최 9단은 2018년 여자 기사 최연소로 9단에 입단해 여자 바둑 기사가 남자 기사보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부순 주역이다. 이달 바둑 통계 사이트 고 레이팅(Go Ratings) 기준 세계 100위권에 든 국내 여자 선수는 최 9단이 68위로 유일무이하다. 2019년 세계 랭킹 2위인 커제 9단을 상대로 벌인 비공식 인터넷 대국에서 승리한 전적은 유명하다.

최 9단은 세계 바둑사상 처음 여성 프로 기사로서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전에도 진출했다. 지난해 열린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8강전에서 중국 양딩신 9단, 4강전에서는 한국 변상일 9단을 꺾고 결승에서 세계 1위 신진서 9단과 맞붙었다. 루이나이웨이 9단이 1992년 제2회 응씨배에서 4강까지 올랐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최 9단은 이달 6일 열린 GS칼텍스배 프로기전 4강에서는 박진솔 9단을 이기며 여자 기사로서 23년 만에 종합기전 결승 진출권을 따내기도 했다.

톱 랭커 박빙 승부

통상 스포츠 대회에서 이목이 쏠리는 톱랭커(상위 랭킹 및 우승자 출신 선수)끼리 맞붙는 경기 비중이 높은 것도 여바리의 매력이다. 리그마다 참전하는 지명 선수의 수가 적기 때문이다. 한국바둑리그가 1지명부터 5지명까지 5 대 5로 바둑을 두는 것과 달리 여바리는 3 대 3으로 대결한다. 인기 선수끼리 대국을 펼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최 9단과의 대국이 기대되는 국내 선수로는 김은지 5단 외에 동갑내기 김채영 8단(H2 DREAM 삼척)이 꼽힌다. 김채영 8단은 2018년 오청원배 세계여자바둑대회에서 최 9단을 이기고 초대 우승컵을 안은 바 있다. 순천만국가정원의 오유진 9단 역시 지난해 오청원배에서 최 9단을 꺾고 챔피언에 올랐다. 2015년 여바리에서 다승상과 MVP를 동시에 따내기도 했다.

기량이 빠르게 성장하는 어린 선수들이 패기 있는 접전을 벌이는 것도 묘미다. 태권도 1단이 9단을 이기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바둑에선 단위에 따른 실력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아 결과를 점치기 어렵다. 8개 팀 참가 선수 32명 중 1990년대, 2000년대 출생한 선수 비율이 81%에 달한다. 바둑 선수의 기량은 통상 10대부터 20대 중반까지 빠르게 성장해 정점을 찍고 하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번 대회의 최연소 선수는 순천만국가정원의 나카무라 스미레 3단(14)이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한국여자바둑리그#여바리#빅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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