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위기’ 지하철 서점, 시민들이 되살렸다…한우리문고 4곳 운영 재개[메트로 돋보기]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25일 15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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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 환승구간의 한우리문고에서 북 큐레이터와 점장이 손님맞이 준비를 하고 있다. 전혜진 기자 sunrise@donga.com

“‘책이 있는 지하철’이라는 간판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2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과 6호선 환승구간의 지하철 서점 한우리문고. 5분 간격으로 환승객이 바삐 오가는 이곳에서 점장 배정인 씨(43)가 꽃을 손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하철 승객들에게 책과 꽃을 파는 이곳은 지하철 서점 한우리문고가 운영하는 지점 네 곳 중 한 곳입니다.

지난해 12월 서울교통공사와의 계약이 종료되면서 폐점 위기를 겪었던 지하철 서점이 우여곡절 끝에 16일부터 다시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37년의 역사를 이어온 지하철 서점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 다시 문 연 지하철 서점
1986년 지하철역 100여 곳에서 운영을 시작한 지하철 서점은 경영난 등으로 하나둘씩 문을 닫았습니다. 지난해는 공덕, 종로3가, 약수, 연신내, 삼각지, 태릉, 왕십리 등 7곳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매달 평균 1만5000명 정도가 방문할 정도로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공간이었습니다.

지난해 12월 서울교통공사는 지하철 서점 임대 사업을 종료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직후 지하철 혼잡도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승객 이동에 방해되는 시설물을 없애 동선을 확보하고 혼잡도를 개선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서점 공간에 다른 점포를 입점시키지 않고 빈 곳으로 둘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계약 종료일이던 지난해 12월 9일. 서점의 단골손님들은 지하철 서점을 마지막으로 방문해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연신내역 지점에서 만난 한 70대 여성은 기자에게 “이곳은 단순 서점이 아닌 ‘사랑방’ 같은 존재라 사라지면 우울증이 생길 것 같다”고 했습니다. 또 “퇴근길에 지하철 서점에 들러 책 구경하는 게 소소한 행복이었는데, 서점이 없어지면 퇴근길이 퇴근길 같지 않을 것 같다”는 직장인 손님도 있었습니다.

폐점 이유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용산구의 한 시민은 “이태원 참사는 무척 안타깝지만, 그로 인해 지하철 서점을 없앤다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데 왜 없애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습니다. 서울교통공사가 역사 내에서 버스킹(거리공연) 등 자유 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밝힌 것도 논란이 됐습니다. 한우리문고 관계자는 “그동안 서점이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민원도 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며 “지하철 혼잡도가 문제라면 버스킹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지하철 서점을 아끼는 시민들의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논란이 커지자 서울교통공사는 “서점이 계속 운영되길 바라는 요구가 있는 만큼 재입찰을 통해 서점 운영을 재개할지 여부를 검토해보겠다”고 밝혔습니다. 공사에 따르면 홈페이지의 ‘고객의 소리’를 통해서도 서점 존치를 원하는 시민 의견이 다수 접수됐다고 합니다.

한우리문고 삼각지역 지점에서 일하는 북 큐레이터 최민정 씨(32)가 단골에게 받았던 메시지를 보여주고 있다. 메시지에는 “일상의 작은 힐링 같은 곳이라 없어졌으면 허전했을 것 같다.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줘 고맙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전혜진 기자 sunrise@donga.com

결국 지하철 서점은 우여곡절 끝에 지난달 10일 재입찰에 성공했습니다. 이어 약 3개월의 명도 유예 기간과 1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쳐 16일부터 다시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다만 혼잡도와 영업 상황을 고려해 점포는 4개로 줄었습니다. 연신내·공덕·삼각지·약수역 지점은 이달부터 영업 재개에 들어갔고, 종로3가·왕십리·태릉입구역 지점은 문을 닫게 됐습니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현장 실사를 나가 혼잡도를 직접 평가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며 “연신내역점은 유지는 하되 혼잡도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 기존의 승강장 층에서 대합실 층으로 이전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 “분주한 지하철 내 쉼터 됐으면”
23일 오후 지하철 서점 삼각지역 지점에서 정세은 씨(35)가 책을 보고 있다. 전혜진 기자 sunrise@donga.com

지하철 서점이 영업을 재개하자 시민들은 다행이란 반응을 보였습니다. 23일 삼각지역점에서 만난 정세은 씨(35)는 “일주일에 한 번은 이곳을 들르는데, 없어질 수도 있다고 해 굉장히 속상했고 이유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며 “요즘엔 서점이 한번 없어지면 다시 생기기가 어렵기에 존치 결정이 돼 다행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집을 사러 왔다는 대학생 이규림 씨(23)는 “휑한 지하철 역사 내에 이런 공간이 있어 환기가 되는 것 같다”며 “앞으로도 쭉 남아줬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배 점장은 “분주한 지하철 내에서는 ‘멈춤’ 자체가 기적”이라며 “꼭 책을 사지 않더라도 잠깐이라도 이곳에 와서 책과 꽃을 구경하고 쉬어갈 수 있는 쉼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양수진 연신내역점장도 “다시 문을 여니 경기도 구리에서 오신 단골손님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며 “기다려주신 손님들과 응원을 보낸 시민분들께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사실 지하철 서점의 위기와 부활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2007년에도 폐점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남은 경험이 있습니다. 서울교통공사가 ‘역사 환경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62곳의 지하철 서점을 철거하기로 했지만, 당시에도 고객 게시판에 철거를 반대하는 글이 이어지며 살아남았습니다.

100여 곳으로 시작해 이제는 4곳밖에 남지 않은 지하철 서점. 이번에도 시민들의 관심 속에 굳건히 살아남은 이곳이 오랫동안 역 내 쉼터로 굳건하게 자리 잡길 바라봅니다.

전혜진기자 sunri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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