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은 환경자산” 땔감 얻었던 작은 화산체에서 힐링공간 변신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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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오름이야기’ <12·끝>

노동의 공간이었던 오름이 휴양, 건강, 트레킹, 조망 등을 위한 곳으로 변모하면서 제주 지역의 대표적 환경자산으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오름의 가치를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 좀더 다양하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노동의 공간이었던 오름이 휴양, 건강, 트레킹, 조망 등을 위한 곳으로 변모하면서 제주 지역의 대표적 환경자산으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오름의 가치를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 좀더 다양하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제주지역에 산재한 작은 화산체인 오름이 대표적인 환경자산으로 부상했다. 우마를 키우고, 초가에 필요한 띠(제주 방언으로는 새), 땔감을 얻었던 노동의 공간에서 경관 감상, 휴양, 건강, 관광, 힐링 등 새로운 개념의 공간으로 변했다는 의미다.

● 중요 환경자산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5일까지 기자가 직접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단체 대화방 등을 통해 오름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오름을 한라산과 더불어 제주의 대표적인 경관자원으로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 123명 가운데 109명인 88.7%가 ‘그렇다’고 답했다. 오름의 가치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는 △대표적인 자연경관(50.4%) △오름 탐방에 따른 심신 건강(14.6%) △지하수 함양(13.8%) △야생 동식물 서식(12.2%) △주민 삶의 터전(8.9%) 등의 순으로 판단했다.

오름에 조성한 인공림의 처리를 묻는 질문에 △간벌작업으로 자연식생과 조화롭게 해야 한다는 응답이 56.1%로 가장 많았고 △관리 후 산림자원 활용(30.1%) △제거(11.4%) △인공림 조성 확대(2.4%) 등으로 답변했다. 우마 방목 중단 등으로 초지에서 숲으로 변하는 오름의 자연 천이 과정에 대해서는 ‘초지와 숲의 공존 관리’가 65.0%로 가장 많았고 ‘자연 천이 과정을 밟도록 놔둬야 한다’는 응답은 25.2%로 나타났다.

오름의 편의시설에 대해서는 ‘자연과 조화롭게 최소로 해야 한다’는 응답이 59.0%로 가장 많았다. 오름 훼손을 방지하는 대책으로는 △자연휴식년제 확대(38.2%) △친환경 탐방 방안 마련(26.8%) △탐방예약제(인원 제한·20.3%) △탐방 가능 및 불가능 오름 지정(9.8%) △오름 입장료 징수(3.3%) 등의 순으로 응답했다. 이번 설문조사 응답자는 40∼50대가 61.0%, 20∼30대 26.8%, 60∼70대 11.4%였고, 오름 탐방 횟수는 10회 이상이 65.9%, 1∼10회 31.7%였다.

● 오름 인식 변화


이번 조사를 통해 오름의 인식, 가치, 기능 등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오름을 악(岳), 산(山)으로 표기했으며 제주 사람들은 ‘악을 오로옴(吾老音), 올음(兀音)이라 부른다’고 했다. 이후 ‘오름’이라는 용어는 기록에서 찾아보기 힘든데 일제강점기인 1937년 7월 25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 ‘350개소는 화산이 분출할 때 생긴 것으로 도민들은 이를 오름이라고 부르며 산이라고 아니 한다’고 적고 있다. 오름은 민초들의 언어였던 것이다.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오름을 악이나 산으로 표기했다. 내용은 대부분 거리를 기록한 것인데 장올악(물장오리), 원당악(원당봉), 성판악(성널오름), 성산, 산방산, 영주산, 고근산 등 풍경이 수려하거나 산정화구호가 있는 오름에 대해서는 따로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들 오름을 바라보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시선은 다소 갈린다. 육지의 산맥처럼 이어지지 않고 독립적으로 솟아있는 모습이 생경했기 때문이다. 김정(1486∼1521)은 유배 생활을 기록한 ‘제주풍토록’에서 ‘구릉은 있되 모두 홀로 떨어져 기울어져 있다. 둘러 휘감는 형세는 없고 오직 거대한 산이 활모양처럼 가운데 솟아있어 눈에 거슬릴 따름이다’고 표현했다. 이에 비해 제주목사를 지낸 이형상(1653∼1733)은 ‘산들이 별처럼 여기저기 벌리어져 있으니 온 섬을 들어 이름을 붙였다면 연잎 위에 이슬 구슬 형태라 하겠다’고 오름을 바라봤다.

제주 고지도에서 한라산 고지대 오름을 산 능선의 봉우리처럼, 저지대 오름을 독립된 산처럼 표기한 사례가 많다. 대동여지도, 제주삼읍도총지도 등 일부 고지도에서는 오름을 지맥처럼 표시했다. 풍수지리적 시각을 보여준 것이다. 신영대 제주관광대 교수는 “육지처럼 산맥이나 물이 연중 흐르는 하천이 없지만 제주지역 풍수에서는 한라산은 모체이고 오름은 지맥을 잇는 도체(導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 지질학적 가치 조명


제주 화산섬에 대한 본격적인 지질 연구는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시작됐다. 지난해까지 발표된 논문은 화산암, 화산층서, 지구물리 및 지질탐사, 고생물학, 지형, 화산성 퇴적층 등의 분야에서 400여 편이 나왔다. 국토 면적의 8%에 불과한 작은 섬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은 조사·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지질학적 가치가 크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다.

오름은 이런 지질 연구를 거치면서 중요성이 확인됐는데 본보 1928년 7월 24일자 ‘식물학 지질학으로 하기대학 개최’ 기사를 보면 ‘화산 분화로 생긴 한라산과 350여 개 화산체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것으로, 조선교육회에서 교원을 대상으로 하기대학을 개최한다’는 내용이다. 1930년을 전후해 화산체로서 오름의 가치가 처음 조명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는 1997년 오름의 종합적인 보고서로 볼 수 있는 ‘제주의 오름’을 발간했다. 오름을 ‘자그마한 산을 말하는 제주도 방언으로 개개의 분화구를 갖고 있는 소화산체를 의미한다’고 했다. 오름을 제주시 210개, 서귀포시 158개 등 368개로 정했다. 2000년 이전에는 큰 화산의 중턱이나 기슭에 형성된 작은 화산 또는 주 화산의 화도가 갈라지거나 위치가 변해서 생겼다는 의미로 오름을 기생화산, 측화산 등의 용어로 불렀다. 하지만 연구가 진행된 결과 독립적인 단성, 복성 화산으로 나타나면서 최근에는 기생화산 용어를 쓰지 않고 있다.

●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 필요


화산체로서 연구 대상이던 오름은 1990년대 들어서 대중적 관심이 높아졌으며 미학적, 인문학적 관점도 나타났다. 경관자원, 생태관광, 트레킹, 힐링 등으로 연구 관심 분야가 넓어졌다. 진종헌 공주대 교수는 “제주인에게 오름은 삶과 죽음의 터전이자 일상과 노동의 무대였다가 1995년 김종철 선생의 ‘오름나그네’(1∼3권) 출간을 전후해 ‘여신의 아름다운 나신처럼’ 오름을 바라보는 심미적 피사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며 “오름 오르기가 제주를 여행하고 경험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되면서 대표적인 상징 경관의 하나가 됐다”고 말했다.

오름이 제주지역 중요 환경자산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풀어야 할 숙제도 많다. 그동안 학자들이 현장답사와 항공사진, 지질도 등을 기초로 화산체 여부를 확인했지만 여전히 정의, 개수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오름의 수를 최대 400여 개로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개발 등으로 원형이 사라진 오름도 있는 상황이다.

특히 지질 분야 외에 동식물 생태, 인문자원 등을 포함한 종합 조사가 필요하고, 체계적인 관리 방안이 시급하다. 윤용택 제주대 교수는 “오름은 파헤쳐질 개발 예정지가 아니라 잘 보존하고 간직해야 할 자연·문화유산이다”라며 “환경, 역사, 위락, 심미, 생태 등의 오름 가치를 밝히기 위해 인문·자연·사회과학의 학제 간(여러 학문 분야가 참여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제주를 화산섬으로 본 최초의 인물은?

동북아 여행 독일 지리학자 겐테
1901년 한라산 등정 후 높이 기록


제주를 ‘화산(火山)섬’으로 처음 바라본 이는 누구일까. 1901년 한라산 정상에 올라가 높이 1950m를 기록한 독일 지리학자인 지크프리트 겐테(1870∼1904)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라산 높이를 기압계 등 과학장비로 최초 측정한 인물로 알려졌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이 한라산을 측량한 1915년보다 앞섰다. 독일 퀼른신문에 실은 그의 여행기에서 ‘화산’ 용어가 등장했다.

겐테는 여행기에서 ‘화산을 향한 출발’ ‘한라산 분화구’ ‘현무암 응회암’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송성회 제주대 명예교수가 1994년 번역한 겐테의 한라산 여행기에 따르면 “용암류들이 바다를 향해 파괴적으로 질주하면서 남긴 거대한 흔적들을 알아본다. 아래로 갈수록 점점 넓어져 강 하구 형상을 띠어 가는 두 개의 검고 널찍한 선을 이루며, 지구 내부의 유동성 용암이 바닷속으로 흘러들어 갔다”고 표현했다.

겐테는 한라산이 이미 화산지형임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천 계곡이 화산 폭발로 형성된 이후 폭우에 의해 더욱 깊어진 것으로 추론했다. 겐테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주변을 항해하다 화산을 보고도 탐방하지 못한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동중국해상에서 바다 위로 솟구쳐 오른, 시칠리아섬 화산보다 2배 이상 높은 한라산을 본 뒤 당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비로운 섬’ 방문과 한라산 등산을 감행한 것이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제주도#오름이야기#환경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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