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의 마지막 봄 [위클리 리포트]

김수현 기자 , 이소연 기자 입력 2021-04-10 03:00수정 2021-04-10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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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돈 잃고 떠밀려와 50년… 고향 같은 곳 차마 못떠나”
7일 오전 서울 노원구 백사마을의 한 골목 어귀. 이 마을에서 53년을 살아온 주민 윤석분 씨(오른쪽)와 이웃 주민 강길자 씨가 담벼락에 걸터앉아 맞은편 에 있는 빈집을 가리키며 “여기 살던 사람들도 마을 을 떠났다”고 말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어느새 여기도 봄이 내려앉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봄이.

쨍한 햇빛에 눈이 부신 날. 하지만 그곳은 화사한 날씨는 도통 어울리지 않았다. 누군가 마주 걸어오면 피해가기도 힘든 좁은 골목. 서로를 버텨주듯 다닥다닥 벽을 맞댄 집들이 왠지 세월에 지쳐 보였다.

군데군데 박힌 붉은 페인트의 동그라미들과 ‘위험’ ‘접근금지’란 큼직한 글씨들. 얼핏 대문 틈으로 보이는 찢어진 우산살마저 한참 등이 굽었다. 사람들이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부르는 이곳. 노원구 중계본동 불암산 자락에 있는 ‘백사마을’은 그렇게 봄 아지랑이조차 먼지에 흩날려 지워졌다.

백사마을은 곧 사라질 운명이다. 서울시는 지난달 2일 2025년까지 이 일대에 대규모 주거단지를 조성하겠다는 재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약 18만7000m²의 땅에 공동주택 1953가구와 임대주택 484가구를 짓는다고 한다. 2009년 주택재개발 정비사업구역으로 지정된 지 12년 만에 들려온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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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동안 백사마을의 삶이 멈춰 있었던 건 아니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 한구석에 쌓인 회색빛 연탄재. 어젯밤 누군가는 그 온기에 기대 또 하룻밤을 지냈으리라. 한때 1713가구 가까이 살았다던 이 마을엔 여전히 203가구가 남아 있다.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떠밀리듯 왔지만 이젠 고향이 되어 버린’ 백사마을 주민들을 만나봤다.
○ 시절에 밀려 만들어진 달동네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내려다본 백사마을은 곳곳에 벚꽃이 만개해 분홍빛을 머금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꽃은 어디서 피어도 꽃이다. 철커덩 문이 열리자 마주한 수선화들. “좀 너절너절해도 사는 건 괜찮다”는 최선진 씨(88) 집 마당은 수줍은 미소만큼 꽃들이 만발했다.

할머니가 이곳에 정착한 건 서른 즈음이었던 1960년대. 50여 년 동안 겪은 풍파를 다 얘기하려면 몇 밤은 새워야 할 터. “하나하나 손수 심은 꽃들”이라며 바라보는 눈빛엔 자긍심과 쓸쓸함이 함께 묻어났다. “재개발이 된다, 된다 하더니만 이젠 진짜 나가려나 봐.” 샛노란 수선화 꽃잎이 살짝 바람에 떨리는 듯했다.

“그때 동대문 막살이집촌에 살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집을 잃었지. 판자촌이니 순식간에 재가 됐어. 다른 이웃들과 80여 명이 여기로 흘러들었어. 나랑 남편도 4남매를 데리고 왔는데 천막 하나 내준 게 고작이었어.”

최 씨는 여기서 악착같이 4남매를 키워냈다. 마을 뒤쪽 불암산 자락에 있는 밭에서 배를 사서는 동대문시장까지 가서 과일 보따리 장사를 했다. 함께 이 집에 창호지를 발랐던 남편은 40여 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래도 함께 지은 집만큼은 그대로 남은 거지. 지금도 셋째 딸이랑 여기서 잘 살고 있네”라고 했다.

김상윤 씨(83)가 백사마을에 들어온 것도 최 씨와 엇비슷한 그즈음이었다. 셈 빠른 할아버지는 “1967년 11월 3일”이라며 허리를 쫙 폈다. 용산에서 철거민으로 살던 그는 그해 집을 잃었고 살 곳을 찾아 여기로 왔다.

“집 잃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다 여기로 밀어 넣었어. 살고 싶어서 온 데가 아니란 말이지. 시절에 떠밀려서 온 거야. 그렇게 이 마을에서 맨 처음 터를 닦았는데 결국 가장 마지막에 나가는 사람이 됐네.”

할아버지의 기억은 정확했다. 백사마을은 일명 ‘이주정착지’였다. 1967년 서울에 불어닥친 도심 개발. 용산과 영등포, 청계천 등지에 몰려 살던 빈민들은 갑작스레 거처를 빼앗긴 뒤 노원구 중계본동 산104번지에 내몰렸다. 백사마을은 그 번지수에서 딴 이름이었다. 엉성한 작명만큼이나 당시 그곳 사정은 열악했다. 개발보상금은 꿈도 못 꿨다. 한 가구당 8평 남짓 땅과 시멘트블록 200장, 텐트 1동이 지원받은 전부였다. 전기는커녕 연탄을 땔 아궁이도 없었다.

○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

그렇게 하나둘씩 이뤄진 마을. 뒤늦게 들어온 이들도 저마다 사정은 애달팠다. 1983년 이곳에 터를 잡은 나춘환 씨(84)는 ‘자개장롱’ 하나만 이고지고 백사마을에 왔다. 번듯한 제지회사를 운영하다 ‘8·3 사채동결조치’에 부도를 맞고 모든 걸 잃은 그도 이곳만이 살길이었다.

“어떻게든 그놈의 농 하나는 건지고 싶었어. 없는 살림에 그 큰 장롱 들어갈 집을 찾으니 구할 수가 있나. 마을 언덕을 얼마나 올라 다녔는지 몰라. 꼭대기까지 와서야 그나마 장롱 들어갈 집을 찾았지.”

그의 집 안방엔 여전히 그 자개장롱이 버티고 섰다. 40년이 넘게 흘렀는데 휜 곳 하나 없다. 나 씨 역시 그렇게 꼿꼿하게 이곳에서 처자식을 건사했다. “애들한테 당당하게 말했어. ‘결혼할 상대 있으면 언제든 여기 데려와 집을 보여주라’고.” 할아버지는 지난한 삶의 무게를 숨기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내 손때가 안 묻은 구석이 없지. 어찌 애착이 가지 않겠어.”

나 씨와 동갑내기인 탁윤균 씨(84)에겐 백사마을이 또 다른 기회의 땅이었다. 경북 성주에서 온 탁 씨는 1971년 당시 거금 14만 원을 주고 땅 32평을 샀다. 그는 자기 손으로 땅을 파고 합판을 잘라 작은 부엌 하나 딸린 단칸방을 넓혀나갔다. 이후 직접 굴착기를 몰고 만든 지하공간에 양말 공장을 차렸다.

함께 내려가 본 공장 지하실. 이젠 퀴퀴한 냄새만이 가득한 그곳엔 “한때 미싱이 20대도 넘게 돌아갔다”고 한다. 저쪽 구석에 놓인 망가진 미싱 한 대가 탁 씨의 과거를 뒷받침했다.

할아버지에게 공장은 꿈이자 자랑거리였다. 공장을 세울 때만 해도 무허가였지만 구청은 그에게 ‘무허가 건물 확인서’를 발급해줬다. 토지 소유주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들에게 권리를 인정해주는 문서라고 한다. 탁 씨에게 확인서는 자신의 인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증서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모여든 백사마을이었지만 이웃은 서로를 보듬으며 삶을 이어갔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시끌벅적 사람 냄새가 가득했다. 백사마을 6통 통장을 지냈던 김상윤 씨는 “우리 통에만 80가구가 모여 살았어. 비슷한 시기에 들어와 나이대도 엇비슷해 잘 어울렸지”라고 떠올렸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1년에 몇 번씩 동네 사람끼리 관광버스 빌려 여기저기 놀러 다녔어. 힘들어도 함께 즐겁게 재밌게 살았어. 아직도 남은 사람들끼린 그때 얘기를 해. 이젠 많이들 마을을 떠났거나 세상을 등졌지만.”

짹짹. 청량한 울음소리. 이웃이 떠난 김 씨네 집 처마엔 올해 제비가 둥지를 틀었다. 할아버지는 커다란 대못 2개를 구해 둥지 아래에 나무판자를 고정시켜 뒀다. “지들도 살아야지. 무너지지 말라고 받쳐뒀어.”

○ 내년 봄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재개발을 앞둔 이 마을에서 1977년부터 양말 공장을 했던 탁윤균 씨가 이날 자신이 운영하던 옛 공장 지하 실을 찾아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밀려들어 닦았던 마지막 터전. 그곳마저 잃는 게 두렵진 않을까. 다행스럽게도 아직 남은 백사마을 사람들은 재개발 뒤에도 계속 이곳에 머물 수 있다.

서울시와 노원구,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2017년 10월부터 33번의 회의를 거쳐 ‘보존 재개발 원칙’을 세웠다. 낡은 저층 주거지를 개발하되 백사마을의 특성과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방식으로 개발하겠다고 한다. 원주민들이 재개발에 떠밀려 가지 않도록 주거권도 보장하기로 했다. 시 관계자는 “1960년대부터 자생적으로 형성된 마을의 역사를 보전하고 원주민들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가능한 임대주택을 공급하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왠지 할아버지 할머니는 마음 한쪽이 쓸쓸하다. 내쫓길 걱정은 안 하지만 그들이 세우고 닦은 ‘백사마을’은 이게 마지막인 게 아닐까. 왠지 자꾸만 작별의 시간이 다가오는 기분이다.

“요즘 매일 이 텅 빈 공장을 찾아와. 동네 한 바퀴 돌아본 뒤에 사무실에 들어와서 커피 마시고 TV도 보고…. 하루도 빠짐없이 와. 괜히 아쉬워서 그런가. 재개발 끝나면, 그래 끝나면 다시 돌아와야지.”(탁윤균 씨)

“나랑 마누라랑 둘 다 여든다섯이야. 재개발이 한 사오 년은 걸리겠지? 그럼 아흔 살이 되는 거네. 우리가 그때까지 살아있을까. 올해 떠나면 이젠 마지막인 거지. 그간 자식들이 모시겠다고 해도 한사코 뿌리쳤는데, 이젠 거기 가서 살아야지. 지금이라도 털고 일어날 수 있지만…. 하루가 아쉬워서, 이렇게 남아 있네.”(나춘환 씨)

취재가 끝나고 백사마을을 떠날 무렵. 이 마을에서 53년 동안 살아온 윤석분 씨(83)는 작은 부탁을 해왔다. 이제 곧 떠날 마을. 사진 좀 찍어 줄 수 있느냐고.

“4통에 살던 주민들 다 떠났어. 나랑 요기 앞집, 동생네만 남아있지. 나중에라도 여기 모습 좀 간직하고 싶은데, 여기저기 다 담아줄 수 있을까.”

찰칵찰칵. 어딘가로 흩어져 보이지 않던 봄 아지랑이 냄새가 코끝을 스쳐간다. 할머니의 수줍은 옅은 미소를 따라. 내년 봄, 제비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둥지를 틀까.

김수현 newsoo@donga.com·이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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