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백기완, 거리두기 영결식…서울시청까지 운구 행렬

  • 뉴시스
  • 입력 2021년 2월 19일 14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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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오전 8시께 발인
시민 및 노동계 관계자 등 인파 몰려
유족들, 영정사진 앞에 큰절하며 오열
대학로서 노제 이후 '서울시청 영결식'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일생을 헌신해온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의 발인이 19일 오전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백 소장의 영정사진 앞에서 큰절을 올린 유족들은 “아버지”를 외치며 눈물을 쏟아냈다.

백 소장의 발인은 이날 오전 8시께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발인식 시작 약 30분 전인 오전 7시30분께부터 장례식장 주변에는 추모를 위해 모인 이들과 취재진 등 80여명이 몰리며 혼잡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 관계자들이 “1층으로 가서 기다려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장례식장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다.

오전 8시께 발인이 시작되자 상복을 입은 유족 등 10여명이 백 소장의 영정사진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아들 백일씨는 연신 “아버지”를 외치며 통곡을 했고, 다른 유족들도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큰 소리로 흐느꼈다. 백일씨는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라고 소리치며 약 5분 넘게 오열했다.

이후 오전 8시11분께 유족이 백 소장 위패와 영정사진을 들고 빈소를 떠나 지하 1층에 위치한 발인장으로 이동했다. 장례위원회 측에서 유족만 입장하도록 출입문을 통제했다.

오전 8시20분께 백 소장의 관이 실린 운구차가 지상으로 올라왔다.

병원 정문 앞에서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라는 문구가 적힌 검은색 피켓을 들고 ‘노동 해방’이라고 적힌 머리띠를 착용한 노동계 관계자들과 일반 시민 등 50여명이 손을 흔들며 운구차를 맞이했다.

이들은 양손을 흔들며 작은 소리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동시에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하기도 했다. 장례위원회 측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켜달라”, “거리를 조금 더 벌려달라” 등의 요청을 수시로 했다.
오전 8시25분께 운구차가 장례식장 정문을 통과했고 유족과 풍물패, 노동계 관계자, 장례위원회 관계자 등 수백명이 뒤를 따랐다.

장례위원회 측은 오전 9시부터 종로구 대학로에서 백 소장을 기리는 노제를 진행했다. 노제는 장례위원회 및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의 조사 및 조무 등으로 구성됐다.

이날 노제에 참여한 김세균 상임장례위원장은 “현장에서 싸우고 있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선생님을 애도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정말 눈물 겹고 감동 그 자체”라며 “백 선생님은 항상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의 친구이자 동지, 그늘이자 방패였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백 선생님이 활동 거점으로 삼았던 이 자리에 서니 다시 백 선생님의 불호령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며 “장례식이 아니라 전사들의 출정식으로 바꾸라고 외치는 것 같다. 저희는 출정하는 전사의 마음가짐으로 이 자리에 하겠다”고 했다.

관계자들의 조사 이후 무용수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에 맞춰 무용을 하는 조무를 마친 뒤, 백 소장의 관을 실은 운구차는 오전 9시45분께 영결식을 위해 서울시청으로 출발했다.

노제 참가자들은 대열을 지키며 2개 차선을 통해 천천히 걸어서 행진했으며, 풍물패와 노동계 관계자들, 유족들, 추모객들 포함 300여명이 행렬을 따랐다.

대학로에서 출발한 운구 행렬은 종로5가, 종각역 사거리, 세종로 사거리 등을 거쳤다. 운구차는 오전 11시10분께 서울시청 앞에 도착했다.

교차로에서는 경찰이 현장 지원을 위해 교통을 통제했고, 틈틈이 운구 행렬에 속한 대열 사이로 차량들을 통과시켰다. 인근을 지나가던 시민들은 풍물패의 행진을 구경하면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영결식이 열리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오전 11시께부터 수백명이 운집했다. 장례위원회 측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수칙을 지키기 위해 구역을 나눈 뒤 2m 간격으로 99개의 의자를 설치했다.

관혼상제는 집회가 아닌 만큼 신고 대상은 아니지만, 코로나19 방역수칙에 따라 야외행사는 99명까지만 참여할 수 있다. 이 인원이 넘어가면 감염병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감염병예방법) 위반이 된다.

구역을 나눈 선 안에 설치된 의자에는 주로 백 소장 유가족 및 장례위원회 등 관계자들이 앉았고, 다른 시민 수백여명은 선 밖에 서서 영결식을 지켜봤다.

장례위원회 측은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며 “2m의 거리를 둔다고 생각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켜달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날 유족 대표로 단상에 선 백 소장 동생 백인순씨는 “날씨도 고르지 못하고 코로나19 때문에 힘든 상황에서도 많이 모여주셔서 감사하다”며 “오라버니가 언젠가는 휠체어를 타시더라도 이곳에 오셔서 여러분을 만나는 정겨운 모습이 곧 올 줄 알았다”고 전했다.

백씨는 “오라버니가 늘 하셨던 말씀은 ‘너도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벗나래(세상) 꿈을 이루자’는 것이었다”며 “이제 벗나래에 계시지는 않지만 큰 꿈을 향해서 다시 길을 찾아서 걸어가실 것”이라고 했다.

당초 계획보다 약 1시간 뒤인 낮 12시께 시작된 영결식은 오후 1시10분께 마무리됐다.
백 소장은 지난 15일 오전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 별세했다. 그는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생활을 이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백 소장은 1932년 황해도 은율군 동부리 출생으로, 1950년대부터 농민과 빈민운동 등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적극 참여했다. 1960년대에는 한일협정 반대 투쟁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백 소장은 1967년 통일문제연구소의 모태인 ‘백범사상연구소’를 세웠으며, 3선 개헌 반대와 유신 철폐 등 활동에도 참여했다. 1974년에는 유신헌법 철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지만 김영삼·김대중의 후보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이후 1992년 독자 민중후보로 다시 대선에 출마했다.

대선에서 낙선한 백 소장은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통일운동과 노동운동 등을 지원했다.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백 소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가사의 원작으로 알려진 시 ‘묏비나리’를 짓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미담·현담, 아들 일씨가 있다. 백 소장의 장지는 경기 마석 모란공원이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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