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터지면 설문조사… 바뀌는게 없는데 뭐하러 하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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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 조사에 선수들 체념 가득
작년 성인 실업팀 1251명 조사
언어-신체-성폭력 피해 밝혔지만 인권위 ‘처벌 강화’ 권고 6개월 걸려

“백날 천날 이런 설문하면 뭐하나요. 개선되는 게 없는데….”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지난해 여름 전국 실업팀 성인 운동선수들을 대상으로 접수한 모바일 익명 설문에는 체념에 가까운 의견도 나왔다. A 선수는 “감독, 코치가 더러운 짓거리를 해도 밥줄 때문에 버틴다”고 했다.

인권위는 이 설문 결과를 바탕으로 지난해 11월 ‘실업팀 성인 선수 1251명 인권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수감 중)의 성폭행 의혹 등이 불거진 뒤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을 꾸려 조사에 나섰다.

인권위에 따르면 이 실태 조사(중복 응답)에서 선수들은 언어폭력 424명(33.9%)과 신체폭력 192명(15.3%), 성폭력 143명(11.4%) 등 다양한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변했다. (성)폭력을 목격한 이들도 704명(56.2%)이나 됐다. 이 조사 자료의 부록에 실린 답변 90여 건 가운데 20건은 A 선수처럼 “설문만 하지 말고 대안을 마련하라”는 취지로 답했다.

한 시청 실업팀에 소속된 B 선수(28)는 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최숙현 선수 같은 비극이 벌어질 때마다 전수 조사한다며 설문을 벌인다”며 “제대로 제도 개선이나 관계자 처벌로 이어진 적이 없다. 결국 피해는 신고한 선수에게 돌아온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고 전했다.

C 선수도 “큰마음 먹고 연맹 사무처장에게 말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묵인했다”고 답변했다. 응답자 가운데 21명은 ‘다양한 방법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 가운데 10명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인권위는 이를 바탕으로 지난해 12월 “독립기구를 만들어 신고와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의 개선안을 대통령과 관계 부처에 권고하기로 했다. 하지만 실제 권고는 6개월 넘게 미뤄지다가 이달 6일 최종 의결했다. 인권위는 “일부 권고 내용이나 법리가 명확하지 못한 부분을 보완하고 있었다”며 “고 최숙현 선수 관련 사안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점을 깊이 반성한다”고 밝혔다.

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체육계 폭력#인권위 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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