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일자리는 없고… ” 저소득층에 침투한 ‘가정집 불법 도박장’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31일 16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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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바깥과 계단을 감시하는 폐쇄회로(CC)TV를 볼 수 있는 TV가 도박장 거실에 설치돼 있다.
빌라 바깥과 계단을 감시하는 폐쇄회로(CC)TV를 볼 수 있는 TV가 도박장 거실에 설치돼 있다.
10월 30일 저녁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위치한 한 빌라에 서울 중랑경찰서 소속 7개 팀 30여 명이 들이닥쳤다. 앞서 경찰서에 ‘이 빌라에서 소음이 크게 난다’는 민원이 접수됐다. 경찰은 사전 조사를 벌여 이 곳이 불법도박장이라는 점을 알아냈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안에 있던 9명은 황급히 놀라 그대로 얼어붙었고, 모두 현장에서 검거됐다.

현장에서 도박을 벌이고 있던 이들은 대부분 50~60대로 5명은 도박을 하는 중이었고, 4명은 이를 지켜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경찰은 증거품으로 현금 100만 원, 테이블 2개, 쿠폰, 화투 등을 압수했다.

경찰 단속에 앞서 본보 취재진은 ‘서울 시내에 가정집으로 위장한 불법도박장이 퍼지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추석 연휴를 이틀 앞둔 9월 20일 해당 빌라를 찾았다. 지하에 위치하고 있는 도박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빌라들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방 2개에 화장실과 거실이 딸린 약 50㎡ 크기의 가정집이 나왔다. 퀴퀴한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노인들이 주로 찾는다는 이 곳은 날이 대낮인 오후 4시인데도 60대로 보이는 5명이 한 방에 둘러 앉아 입에 담배를 문 채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참여하기 위해서는 최소 5만 원의 판돈이 필요했다.

도박장 운영자 A 씨는 칩처럼 사용하는 종이 쿠폰을 만들어 도박장 안에서 쓰게 했다. A 씨 옆에 놓인 쇼핑백 안에는 돈과 쿠폰이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판이 끝나고 쿠폰을 반납하면 돈으로 바꿔주는 방식이다. 판돈은 점수 당 500원으로 많게는 시간당 10만~15만 원이 오갔다. 건물 밖과 계단에는 폐쇄회로(CC)TV가 설치됐고, 거실에서 화면을 보면서 외부를 감시했다.

10월 8일 오후 8시 경 이 도박장에서 1.7㎞ 떨어진 곳에 위치한 또 다른 도박장을 찾았다. 방이 하나 더 있을 뿐 앞선 도박장과 크기와 구조가 비슷했다. 이 곳에는 주로 주부들의 발길이 잦았다. 도박장 내부는 무척 분주했다. 방 안에서 화투판을 벌이는 5명과 이를 구경하는 2명이 있었다. 이들은 도박판 앞에 둘러앉아 재떨이를 두고 담배를 피우며 판을 벌이고 있었다.
거실에는 4명이 삼삼오오 모여 “왔냐, 오랜만이다”, “오늘 좀 치고 가”라고 친숙하게 인사를 나눴다. 한 쪽에서는 50대로 보이는 여성 한 명이 간식으로 먹을 옥수수를 찌고 있었고, 또 다른 2명은 등이 꺼진 어두운 방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하지만 편안해 보이는 내부 분위기와 달리 현관문은 테이프와 포장용 에어캡(일명 ¤¤이)으로 감싸 바깥에서의 출입을 차단했다. 도박에 참여했던 이들의 전언에 따르면 이곳은 최소 1년 이상 운영됐다고 한다.

두 곳의 도박장에서 만난 이들은 대부분 평범한 주부와 노인으로 월 소득 100만 원 내외의 저소득층인 것으로 알려졌다.

도박장 현관문은 테이프와 포장용 에어캡(뾱뾱이)로 감싸 바깥에서의 출입을 차단했다.
도박장 현관문은 테이프와 포장용 에어캡(뾱뾱이)로 감싸 바깥에서의 출입을 차단했다.
노인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도박장에는 택시기사, 보험 판매원, 식당 아르바이트, 화물트럭 운전사, 다방 주인 등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한 60대 남성은 이 곳을 가리켜 “할 일 없는 노인이 와서 서로 돈 따먹기를 하는 곳”이라고 규정했다. 60대 여성은 “노인들이 일자리는 없고, 시간은 많다 보니 소일거리를 찾기 위해 자연스럽게 이 곳에 몰려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물차 운전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는 김모 씨(57)는 “자주 가는 술집이 문을 닫고 나서 특별한 인생의 낙이 없다”며 “휴대전화를 잘 다룰 줄 몰라 모바일 고스톱 같은 것은 하기 어렵고, 경마나 경륜을 하기에는 집에서 거리가 너무 멀어서 집 근처 도박장을 찾게 됐다”고 말했다.

주부 대상 도박장 역시 비슷했다. 이들 또한 ‘삶의 낙이 없고, 소일거리가 필요했다’고 입을 모았다. 조그만 다방을 운영하며 한달 100만 원 내외를 번다는 B 씨(63·여)는 “이혼하고 계속 혼자 살았다. 너무 우울하고 외로워서 이 곳을 찾게 됐다”며 “나이 들어 혼자 집에 있으면 잠도 안 오고 여러 가지 생각도 많은데 밤에 놀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요양병원에서 영양사로 일하며 100만 원 미만의 소득을 올리고 있는 C 씨(60·여)는 “일이 힘든데 스트레스를 풀 데가 없어 일주일에 한 번씩 이곳을 찾았다”고 언급했다. 경찰은 앞서 입건한 5명을 포함해 총 14명을 도박과 도박방조, 도박장소 등 개설 혐의로 입건했다.

노인 상대로 운영하는 도박장에서는 시비 끝에 60대 여성의 손가락이 절단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김모 씨(57)는 10월 16일 ‘잠깐 돈을 찾으러 간 사이에 내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유로 60대 여성 D 씨와 말다툼을 벌였다. 술에 취해 있던 김 씨는 D 씨의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잡아 강하게 깨물었다. D 씨는 1차 봉합수술을 했으나 피부 일부는 괴사했다. 서울 중랑경찰서는 김 씨에게 상해와 도박 혐의를 적용해 26일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장수 강력계장은 “비록 소규모지만 주택가에서 도박장을 벌일 경우 주민들의 삶에 피해를 끼칠 수 있다”며 “운영에 대해 신고나 제보가 접수되면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단속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윤다빈기자 empt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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