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 연구에 무관심한 제주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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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발굴 등 역사규명에 소홀한채 ‘탐라’ 단어만 붙인 행사에만 관심
개발사업으로 초기 유적 사라져

출연진만 8000여 명에 이른 제주지역 대표 축제인 탐라문화제가 14일 막을 내렸다. 하지만 제주 정체성의 중요 근간인 탐라국 유적을 찾아보는 탐방이나 관련 프로그램은 없었다. 제주도 제공
출연진만 8000여 명에 이른 제주지역 대표 축제인 탐라문화제가 14일 막을 내렸다. 하지만 제주 정체성의 중요 근간인 탐라국 유적을 찾아보는 탐방이나 관련 프로그램은 없었다. 제주도 제공

제주를 대표하는 축제인 ‘제57회 탐라문화제’가 14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출연진만 8000여 명에 이른 가운데 무형문화체험, 찾아가는 제주문화박물관, 문화체험, 참여문화행사 등을 펼쳤다. 하지만 정작 탐라의 실체인 ‘탐라국’ 유적을 찾아보거나 탐방하는 행사는 없었다. 탐라문화제만이 아니다.

탐라국에 대한 발굴 노력이나 역사적 규명 작업에 소홀히 한 채 무작정 ‘탐라’라는 단어를 붙이고 있다. 제주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 제주도가 관심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탐라국 규명에 무관심한 제주도

제주도의 무관심은 예산 편성 및 배정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올해 탐라문화권 정립사업 추진 6억9000만 원, 탐라문화유산 발굴 및 복원사업 3억5000만 원 등의 예산을 편성, 집행하고 있다.

‘탐라’라는 단어를 넣었을 뿐 정작 사업 내용은 한라산신제, 일제강점기 문화유산 지적도, 4·3상생해원굿, 송당 마불림제 등으로 탐라국과는 거리가 멀다.

외세에 의한 핍박, 점령 등으로 제주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은 항파두리 항몽유적 정비사업에 36억6500만 원의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면서도 제주 정체성의 중요 부분인 탐라국에 대한 유적 발굴이나 연구조사 예산은 거의 없다. 제주도 관계자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제주 사람들을 동원해 구축한 진지동굴 정비에만 올해 8억7000만 원을 배정하면서도 제주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탐라국 연구에 예산이 없다는 것은 철저히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문헌상으로 ‘탐라’가 처음 등장한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이다. 여기에 ‘문주왕 2년(476년) 탐라국에서 공물을 바치자 왕이 기뻐해 사자에게 은솔의 관직을 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문무왕 2년(662년) 탐라국주 도동음율이 신라에 투항하여 속국이 됐다’고 적혔다. 그동안 출토된 유물·유적과 문헌자료 등을 기반으로 제주지역 학계에서는 탐라국이 3∼5세기에 변한이나 남부 가야와 활발한 교류를 했고 6∼9세기는 백제와 신라의 통제를 받았지만 외교를 제외하고는 독립적인 행보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정체성 확립을 위한 종합연구 필요

탐라의 존재는 확실하지만 고고학적 유물은 부족하다. 탐라가 국가로서 체제를 갖췄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유물·유적은 있지만 아직까지 왕릉으로 추정되는 유적은 발굴되지 않았다. 그나마 발굴한 제주시 외도동 주거지, 용담동 철기부장묘 등 탐라 초기 유적은 개발사업, 사유권 행사 등으로 사라지고 있다. 박찬식 제주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장은 “탐라국에 대한 종합연구와 함께 개발사업으로 유물·유적이 묻히기 전에 탐라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발굴조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탐라국뿐 아니라 역사자원에 대한 제주도의 무관심은 ‘고산리 선사유적’(사적 제412호)에서도 드러난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 위치한 선사유적은 국내 유일한 신석기 초기 유적이다. 이 선사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오는 역사적 흐름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91년부터 1998년까지 3차례 발굴조사에서 석기 9만9000여 점, 토기 1000여 점이 출토됐지만 활용 방안이 추진되지 않고 있다. 6월 방문자센터가 문을 열었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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