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으로 8억원 털고 비트코인 돈세탁해 사라졌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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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사칭해 20대 여성 등쳐… 1인 피해금액으론 최대

“서울중앙지검 ○○○ 검사입니다. 혹시 지인한테 계좌 빌려주셨나요?”

20대 여성 김모 씨는 이달 초 전화 한 통을 받고 크게 당황했다. 전화기 속 남성은 “김 씨 명의의 대포통장이 범죄에 이용되고 있으며 통장에 남아 있는 돈을 빨리 조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장에 8억 원가량이 있던 그는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김 씨는 인터넷뱅킹으로 남성이 알려준 계좌 4곳에 돈을 나눠 보냈다. 이 중 한 곳은 이 남성이 알려준 이름으로 송금인도 바꿨다. 그는 뒤늦게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이었다는 것을 알고 경찰에 신고했다. 범인은 이미 가상통화거래소를 이용해 8억 원을 현금화해서 사라진 뒤였다.

가상통화가 돈세탁 등 범죄에 이용되고 있다. 21일 금융감독원은 최근 보이스피싱으로 지금까지 1인 전화금융사기 사상 최대 규모인 8억 원의 피해가 발생했다고 21일 밝혔다. 범인이 이처럼 1시간도 안 돼 큰 액수를 챙기고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은 가상통화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범인은 대포통장 3곳과 가상통화거래소 계좌 한 곳으로 8억 원을 나눠 받았다. 이후 대포통장에 있는 돈도 거래소로 옮겨 가상통화를 8억 원어치 샀다. 이를 전자지갑으로 옮긴 뒤 현금화해 달아났다. 김범수 금감원 불법금융대응단 팀장은 “그동안 보이스피싱 범인들은 얼굴을 감추려고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이용했는데 계좌당 하루 600만 원밖에 인출이 안 됐기 때문에 피해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았다”고 말했다. 이어 김 팀장은 “대형 가상통화거래소는 출금 제한이 있지만 중소형 거래소는 무제한으로 돈을 찾을 수 있다”며 “금융범죄에 이용되면 피해 규모가 커질 수 있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이 같은 가상통화를 이용한 범죄는 범인을 잡기도 어렵다. 이론적으로는 일반 국내 거래소에서 가상통화를 사고팔면 회원정보가 있기 때문에 범인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국내 거래소를 이용했다고 해도 가상통화를 해외 거래소 전자지갑이나 사설 전자지갑으로 옮기면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렵다. 전자지갑은 명의 없이도 휴대전화 번호만 있으면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 같은 범죄를 막고자 이달 13일 차관회의를 열고 가상통화에 대한 고강도 규제 방안을 내놓았다. 가상통화 거래는 은행이 발급한 ‘가상계좌’를 통해 실명이 확인될 때만 가능하고 거래소들이 해킹이나 개인정보 유출에 대비해 보안을 강화하도록 했다. 거래소들도 자율규제안을 내놨다. 본인 확인을 철저히 하고 고객의 금전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고객 자산을 은행에 예치하는 등 보안 시스템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같은 방안들은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거래소의 책임도 크다. 김 씨의 사례에서도 범인이 거래소에서 ‘대포 아이디’를 만들었고 거래소와 연동되지 않은 별도의 전자지갑을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거래소는 범인의 신분 확인에 실패했다.

전문가들은 정부나 거래소가 가상계좌를 대포통장처럼 이용한 뒤 전자지갑을 통해 현금화하는 수법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라고 설명했다. 홍기훈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는 “거래소에 속해 있지 않은 전자지갑이나 해외 거래소의 전자지갑으로 돈이 빠져나가면 사실상 찾을 수 없다. 국가 간 협정을 맺어도 거래소들이 민간 영역으로 규정돼 있어 찾을 방도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결국 거래소들이 본인 확인을 잘하고 당국에서 계속 이를 주시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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