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명인열전]친정엄마처럼 이민여성 돌보기 10여년… “이해와 배려가 가장 중요”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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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한신애 광주 북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

한신애 광주 북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왼쪽)이 센터에서 이민여성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이민여성들의 대모로 불리는 한 센터장은 “다문화 30년을 맞아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와 배려”라고 말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한신애 광주 북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왼쪽)이 센터에서 이민여성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이민여성들의 대모로 불리는 한 센터장은 “다문화 30년을 맞아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와 배려”라고 말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지난달 28일 광주 북구 양산동 북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 앳된 외국인 여성들과 나이 지긋한 한 중년 주부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마치 친정집에 온 딸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정겨워 보였다.

한신애 북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64·여)은 이들에게 친정 엄마나 다름없다. 한 센터장은 “처음에 이민여성들과 대화가 어려울 정도로 다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면서 “각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니 한 가족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2005년 다문화가정을 지원하는 1호 사단법인인 광주이주여성지원상담센터를 설립하고 이민여성들과 인연을 맺었다. 다문화라는 말이 낯설었던 때부터 이들을 보살펴 왔지만 그의 선행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광주이주민건강센터 박성옥 사무국장(48·여)은 한 센터장과 이민여성들이 가족처럼 지낼 정도로 정이 돈독하다고 전했다. 박 국장은 외국인 근로자 치료를 돕는 통역 봉사요원이 필요해 이민여성들을 알게 됐다. 박 국장은 “한 센터장을 오랫동안 만났지만 사비를 털어 형편이 힘든 이민여성들을 돕는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고 말했다.

○ 주부에서 시민운동가로


한 센터장은 광주 광산구 송정동이 고향이다. 1971년 전남대 화학과를 입학한 뒤 교내 방송국 활동을 계기로 대학 4학년 때 1974년 전일방송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방송부스 안에서는 말을 잘했지만 밖으로 나오면 수줍어했다. 전일방송에서 2년간 일하다 당시 PD였던 이상옥 씨(68)를 만나 결혼한 뒤 직장을 그만뒀다. 전일방송은 5·18민주화운동 직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문을 닫았다.

전업 주부로 지내던 한 센터장은 1982년부터 광주YWCA 사회문제부 간사를 맡으며 시민사회운동에 눈을 떴다. 이후 광주열린가족상담센터 사무국장, 광주YMCA·YWCA이사, 광주민주언론운동협의회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그에게 시민사회운동의 출발점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였다. 가장 먼저 외국인 노동자와 이민여성들이 눈에 들어왔다. 1990년대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에 관심을 갖고 독일 이민 현장을 답사하기도 했다.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느껴 1998년 동신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2001년 대학원을 졸업한 뒤 동신대 종합사회복지관 재가복지팀장, 광주 남구 양지종합사회복지관 복지행정팀장 등 사회복지 전문가로 활동하며 현장의 감을 익혔다.

그는 현장에서 답을 찾는 활동가다. “시민사회운동은 거창한 것이 아니에요. 환경문제를 예를 들어 볼까요. 저는 승용차에 폐지를 가득 싣고 다닙니다. 폐지를 모아 팔아 각계의 후원금으로 씁니다. 작은 힘이 모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죠.”

한 센터장은 2005년 광주의 한 상담지원센터에서 이민여성을 처음 만났다. 2007년 광주지역 이민여성이 급격히 늘자 다문화가정 지원에 뛰어들었다. 그는 거동이 불편한 홀몸노인을 병원에 데려가거나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기초수급자를 보살피는 것보다 다문화가정을 챙기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 생각했다. 일부 다문화가정은 이민여성의 가출, 나이 많은 남편의 폭력, 궁핍한 가정 형편 외에 문화 격차와 언어소통의 어려움이 더해져 아예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 다문화 30년, 이해와 배려 필요


한국의 다문화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해 걸음마를 뗐다. 이어 농촌 총각들의 결혼 붐이 이어졌다. 1992년 한중 수교로 중국동포가 다문화 2세대를 이뤘다. 2000년대부터 한류 열풍이 불면서 동남아와 중앙아시아 이민여성들이 ‘코리아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왔다.

다문화가정 통계는 2007년 처음으로 집계됐다. 당시 결혼이민자는 8만9002명, 다문화가정 자녀는 5만8007명이었다. 2015년에는 결혼이민자가 23만8161명, 다문화가정 자녀는 19만7550명으로 약 3배로 늘었다. 호남제주 지역 결혼이민자는 2만7806명, 다문화가정 자녀는 2만9409명으로 전국의 10% 정도를 차지한다.

한 센터장은 한국이 외형은 다문화사회로 진입했지만 내면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민여성들은 대화를 주저하는 등 우리 문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 동남아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 돈 벌러 온 사람이라는 편견까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간혹 동남아 이민여성들에게 영어로 말을 거는데 사실 한국말을 잘하는 여성이 많아요. 한국에 온 동남아 근로자 대부분이 현지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인데 미국·유럽 백인이 아니면 무시하는 문화가 잘못된 것이죠.”

그는 “한국이 진정한 다문화사회가 되려면 세계 각국의 문화를 인정하고 이민여성이 외국인이라는 인식을 버려야 한다”며 “최근 한국 남성들이 베트남 여성과 결혼을 많이 하는 이유는 베트남이 가족 중심 가치관 등 정서적 동질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베트남이 정서적 동질감은 있지만 문화는 엄연히 다르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밥그릇을 들고 먹으면 복이 달아난다고 싫어하지만 베트남에선 밥그릇을 들고 식사를 해도 상관없으며 베트남에서는 어른 앞에서 양팔을 끼고 있어도 무시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민여성들을 보살피며 가장 가슴 아팠던 사연을 털어놨다. 20대 초반에 시집와 스무 살 많던 남편과 사별한 베트남 출신 A 씨(27)다. A 씨는 4년 전 남편을 떠나보낸 뒤 초등학생 아들을 홀로 키우면서 중고교 과정 검정고시에 합격해 대학 진학의 꿈을 키우고 있다. 이민여성들은 통상 자녀를 한 명 이상 낳고 이혼율은 30%대로 한국 여성들과 비슷하다. 그가 만나는 다문화가정 자녀들은 신생아부터 25세 대학생까지 다양하다. 그는 정작 군에 입대한 아들의 면회를 가지 못했지만 다문화가정 자녀들은 항상 챙긴다.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인구감소 절벽에 놓인 한국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느냐 여부는 우리 사회의 포용력에 달렸습니다. 다문화 30년을 맞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해와 배려입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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