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화제]‘명당 기계’ 찾아 원정… 10대들 사이 ‘뽑기 셔틀’까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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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인형뽑기 열풍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한 인형뽑기방에서 인형 뽑기에 열중하는 여고생들. 인형 뽑기는 현행법상 사행성 게임으로 분류돼 청소년은 오후 10시 이후에는 출입할 수 없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한 인형뽑기방에서 인형 뽑기에 열중하는 여고생들. 인형 뽑기는 현행법상 사행성 게임으로 분류돼 청소년은 오후 10시 이후에는 출입할 수 없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단돈 몇천 원으로 이 정도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게 별로 없잖아요.”

지난달 27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한 게임장에서 연신 버튼을 눌러대던 대학생 김모 씨(24)가 무심한 듯 말했다. ‘시크한’ 말투의 김 씨가 몰입하고 있는 건 바로 인형 뽑기다. 그는 “수업이 없을 때 종종 인형 뽑기를 하러 온다”고 말했다. 김 씨가 1시간 동안 들인 돈은 2만 원 남짓. 뽑은 인형은 6개였다. 김 씨가 이렇게 인형 뽑기에 빠진 이유는 뭘까. 김 씨가 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소소한 만족’이었다. 대학 3학년인 김 씨는 “전역 후 취업 준비에 아르바이트까지 하느라 일상에서 얻는 행복이랄 게 없다”고 말했다. 인형 뽑기가 유행하기 전까지 흔한 스마트폰 게임도 하지 않았다는 김 씨는 “뽑은 인형을 자취방 침대 한쪽에 쌓아 놓는 게 요즘 생활의 낙”이라고 했다.

가성비 최고의 오락

전국에 인형 뽑기 열풍이 불고 있다. ‘초딩’이나 할 것 같던 인형 뽑기는 중고교생 사이에서도 인기가 폭발적이다. “그깟 인형 따위”라며 코웃음 치던 대학생이나 직장인 중에도 즐기는 사람이 많다.

이런 열풍을 타고 인형뽑기방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올 1월 게임물관리위원회에 등록된 인형뽑기방은 1164개. 지난해 1월 대비 50배 이상 늘어났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자신이 뽑은 인형을 자랑하거나 인형 뽑기를 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 등의 게시물이 넘쳐난다. 인스타그램에 ‘#인형뽑기’ 해시태그를 붙인 게시물은 현재 40만 개에 육박한다. ‘마음에 드는 인형을 뽑았다’거나 ‘수만 원을 들였는데 뽑은 인형이 없다’ 등의 내용과 함께 뽑기에 열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형은 만화 ‘포켓몬스터’ 주인공인 피카추. 최근 스마트폰 게임 ‘포켓몬고’ 열풍에 힘입어 포켓몬 인형은 인형뽑기방의 효자다. 인형뽑기방에서 피카추 인형이 가득 들어있는 기계를 이용하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다. 피카추 외에도 포켓몬고에 등장하는 ‘꼬부기’, ‘고라파덕’ 같은 인형도 인기가 높다.

전문가들은 인형 뽑기 열풍을 단순히 인기 있는 게임의 등장으로 보는 대신 일종의 사회현상으로 분석했다.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유행할 정도로 불안한 사회 환경 속에서 작은 투자로 얻는 인형이 일종의 대리 충족 효과를 준다는 것이다. 중고교생들의 입시 경쟁, 대학생들의 취업 전쟁 속에서 작은 성취감을 느끼는 통로가 됐다는 해석이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젊은층이 여가 선택조차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따지지 시작한 문화가 인형 뽑기 열풍에 일조했다는 시각도 있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과)는 “오락이나 도박도 큰 성과나 엄청난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쓸 수 있는 비용으로 최대한의 기쁨을 찾는 것”이라며 “소소하게 일상의 분노와 불만을 표출하는 통로로 인형 뽑기가 유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종 ‘셔틀’까지 등장

초등학교에서는 인기 있는 인형을 잘 뽑는 친구까지 덩달아 주목을 받을 정도다. 이렇다 보니 신종 ‘인형 셔틀’까지 나타나고 있다. ‘일진’으로 불리는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이 뽑거나 뽑기 직전의 인형을 빼앗는 것이다.

윤모 씨(45·여·서울 송파구)도 아들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윤 씨에 따르면 한 기계에서 연달아 인형 뽑기를 하던 아들이 갑자기 다른 친구에게 뽑기 순서를 내줬다는 것. 윤 씨는 “큰돈을 뺏긴 것도 아니고 인형이 대수인가 싶어서 흘려들었는데 생각해 보니 심각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10여 차례 시도 끝에 ‘인형탑’을 쌓아서 성공 직전까지 만들었는데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일진 학생이 “이제 내가 할 차례니까 너는 빠지라”고 했다는 것이다.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서 ‘뽑기 셔틀’로 불리는 학생들은 일진 학생이 인형을 잘 뽑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맡는다고 한다. 기계로 인형을 집어 인형이 나오는 투입구 주변에 인형탑을 쌓아 올리는 것이다. 인형탑이 완성되면 기다리고 있던 일진 학생은 탑을 무너뜨려 한 번에 인형을 챙겨간다. 이렇게 하면 한 번에 여러 개의 인형을 뽑아 갈 수 있다.

인형탑을 쌓는 데는 보통 1만∼3만 원 정도가 필요하다. 용돈을 뺏는 대신 물건을 사오도록 하는 과거 ‘빵 셔틀’과 같은 학교 폭력인 셈이다. 윤 씨는 “빵 셔틀 같은 문제를 인형 뽑기 때문에 또다시 고민하게 될 줄 몰랐다”면서 “사실상 돈을 뺏는 것과 다름없는데 학교나 경찰 등이 이런 현상을 알고나 있는지 의문”이라고 걱정했다.

업주들 “도박 아닌데…”

현행 게임산업진흥법 시행령에 따르면 뽑기 등 게임의 경품 가격은 5000원 이하여야 한다. 5000원 이상의 인형을 취급하면 불법이다. 적발되면 영업정지가 내려진다. 또 오후 10시 이후 청소년 출입도 금지다. 인형뽑기방 업주들은 13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경품의 금액 기준을 높여달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아예 인형 뽑기를 사행성 게임에서 제외해 달라는 의견도 많다.

서울 영등포구에서 인형뽑기방을 운영하는 박모 씨(41)는 “지금 가게에서 사용하고 있는 인형들도 소매가로는 2만 원이 넘는 상품”이라며 “도매로 대량 구입해 어느 정도 가격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박 씨는 “최근 몇 달 사이 인형뽑기방의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매출이 30% 이상 급감했다”고 주장하며 “몇몇 업주들의 무리한 영업이 인형뽑기방 전체의 문제인 것처럼 비화돼 속상하다”고 털어놨다.

남궁현 한국게임산업협회 회장은 “최근 서울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중 단속이 이뤄져 영업정지 1개월 처분을 받은 곳이 많다”며 “인형을 도매로 구입해도 최소 7000∼8000원을 줘야 하는데 이를 5000원에 구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남궁 회장은 “인형 뽑기를 사행성 도박과 같은 게임으로 분류한 과거 게임산업진흥법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인형 뽑기 기계는 배당이나 확률 등으로 수익을 내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도박 차원에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동연 기자 call@donga.com
#인형 뽑기#오락#인형뽑기방#인형 셔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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