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훈]사무실의 ‘진상’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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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소비자경제부 차장
김상훈 소비자경제부 차장
며칠 전 친구가 휴대전화로 동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그날 출근길에 찍은 거란다. 동영상을 열어보니 전철 안이었다. 셔츠 차림의 30대 후반, 혹은 40대 초반 남성이 골프 스윙 연습을 하고 있었다. 왜 이런 동영상을 찍었느냐고 묻자 친구가 킥킥대며 말했다. “하도 한심해서…. 혼잡한 출근길 지하철에서 뭐 하는 짓인지….”

요즘 어디를 가나 이런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 편하면 된다는 사람들. 이들의 안하무인을 ‘진상 짓’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며칠 전 휴가를 다녀온 후배도 진상 짓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불쾌한 경험을 했다. 경북 안동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 안이었다고 한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 8명이 탑승했다. 그들은 입석표를 끊은 것 같았다. 입석으로 열차를 탄 사람들은 맨 앞좌석과 벽 사이의 공간을 선호한다. 그 공간을 만들려면 앞좌석을 두 번째 좌석과 마주 보게 돌려놓아야 한다. 공교롭게 후배는 맨 앞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후배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좌석을 돌려놓았다. 후배는 졸지에 낯선 이들과 얼굴을 마주 보면서 가야 하는 상황이 됐다. 후배가 좌석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하자 그들이 허허거리면서 “한국인끼리 이러지 맙시다. 불편해도 좀 참고 가 주세요”라고 했단다.

기차가 출발하자 그들은 아예 통로에 간이 의자를 펼쳐놓고 술을 마셨다. 휴대전화로 올림픽 경기 방송을 보면서 괴성을 질러댔다. 후배는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은 맥주를 바닥에 쏟고 닦지도 않았다. 이런 진상 인간들을 매일 접하지 않는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기분이 상해도 곧 잊혀진다. 하지만 이런 진상들을 매일 사무실에서 접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얼마 전 상사인 부장검사의 폭력에 시달리던 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검찰청 감찰본부가 밝힌 부장검사의 진상 짓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폭언은 일상적이었고, 폭력도 동반됐다. 부하 직원들을 세워놓고 보고서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구겨 던졌다. 예약한 식당과 메뉴가 성에 안 찬다며 모욕을 줬다. 누리꾼들은 “우리 상사와 똑같다”며 공분했다.

최근 건전한 조직문화를 만들겠다며 정시 퇴근을 독려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특정 요일을 정해서 야근을 금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만난 직장인의 상당수가 이 혜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한밤의 사무실은 환하다. 일거리를 싸들고 퇴근하는 이도 많다. 혹시라도 상사의 전화를 제때 받지 못하면 불호령이 떨어질 테니 휴대전화는 항상 켜둬야 한다. 이런 직장인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은 이상일 뿐 현실이 아니다.

회사 차원에서 직원들을 위한 여러 시스템을 만들었는데도 일터의 삶이 고통스럽다면 그 원인이 같은 조직원, 특히 상사에게 있을 확률이 높다. 부장검사가 조금만이라도 부하 직원을 배려했더라면 억울한 죽음은 피했으리라. 하지만 부장검사는 부하 직원의 고통을 무시했다. 어쩌면 부장검사는 자신이 진상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진상’은 원래 조선시대 때 임금에게 보내는 진귀한 특산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최상품만이 진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상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폐단이 나타났고, 급기야 부정적인 뜻으로 변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들 처음부터 진상이었겠는가.

부하 직원들이 자신을 진상 인물로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사가 적지 않다고 한다. ‘진상 감별 체크리스트’ 같은 거라도 만들어야 할까. 우선 나부터 거울을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지금 어떤 인간인가.

김상훈 소비자경제부 차장 corekim@donga.com
#출근길 지하철#진상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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