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걸이로 얼굴감춘 범인 ‘콕’… 국내 法보행 연구 본격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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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대 교수팀-국과수-기술표준원, 보행패턴 분석 착수
적외선카메라 등 첨단장비 동원… 보폭-보행속도-관절각도 수치화
무릎높이 등 신체특징 DB 구축… CCTV속 범인 수사자료로 활용

대구고등법원은 올해 5월 ‘금호강 살인사건’ 피의자 박모 씨(30)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보험금을 가로채기 위해 친구를 살해한 혐의다. 법원은 그의 ‘걸음걸이’를 참작해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하고 1심 무기징역을 그대로 선고했다.

2015년 범죄 당시 그는 현장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경찰이 사건 현장의 폐쇄회로(CC)TV 영상을 확보했지만, 어두컴컴한 새벽 시간 후드 모자를 푹 눌러쓴 피의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범인을 특정한 것은 영상 속 피의자의 걸음걸이. 경찰은 CCTV 영상을 분석해 범인이 발을 앞으로 반원을 그리는 ‘원회전 보행’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원회전 보행과 함께 팔자걸음과 O자형 다리 등 3가지 특징이 범인을 특정 짓는 증거가 됐다.

범죄자의 걸음걸이를 수사에 응용하는 ‘법(法)보행’이 주목받고 있다. 걸음걸이에 나타나는 특성을 분석해 동일인 여부를 판단하는 과학 수사 기법이다. CCTV 영상만 있으면 보행 패턴을 분석해 특정인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걸음걸이로 신체 특징을 알아내는 것도 가능하다. 이를 위해 국내 연구진이 ‘표준 걸음걸이 패턴’ 연구를 시작했다.

○ 걸음걸이, 신발 마모로 특정인 여부 파악

명지대 반상우 교수(산업공학·인간공학) 연구팀은 8일 10∼60대 한국인 남녀를 대상으로 보행 패턴 연구를 시작했다. 많은 사람의 걸음걸이 패턴을 분석해 표준을 만들면, 사람들의 걸음걸이 패턴을 쉽게 분석할 수 있다. 반 교수 연구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및 국가기술표준원과 공동으로 표준 보행 패턴 통계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고 있다.

12일 경기 용인시의 반 교수팀 연구실에서 살펴본 법보행 연구에는 첨단 장비가 총동원됐다. 6대의 적외선 카메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피험자가 걸어가면 컴퓨터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걸음걸이의 특징이 나타났다. 발을 내디딜 때 땅에 가해지는 압력의 분포는 특수 발판을 통해 측정됐다. 보폭, 보행 속도, 관절이 구부러지는 각도와 발의 각도 등이 수치로 기록됐다. 컴퓨터 화면에는 골격 형태가 점과 선으로 표시됐고, 피험자가 움직일 때마다 따라 움직였다.

연구진은 걸음걸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발 길이와 정강이 길이, 무릎 높이와 발목 높이, 어깨 너비 등을 함께 측정했다. 신체 특징과 보행 패턴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려는 시도다. 연구진은 우선 200명의 보행 패턴을 분석한 후 앞으로 소지품을 들거나 가방을 메고 있는 사람의 걸음걸이 등을 추가로 수집할 계획이다.

연구실 한편에서는 한 연구원이 피험자가 신고 있던 신발을 꼼꼼히 살펴보며 사진을 찍었다. 신발의 뒤꿈치 쪽이 어떤 방향으로 닳았는지, 신발을 3등분 했을 때 어느 부위가 가장 마모가 심한지 등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이런 분석을 통해 CCTV 속 등장인물이 피의자과 같은 인물인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반 교수는 “걸음걸이와 신발의 마모 특징은 개인의 습관과 신체 조건에 영향을 받는 개인의 고유 정보”라고 설명했다.

○ 세계적인 관심 끌고 있는 법보행 수사 연구

법보행 수사가 가장 먼저 효력을 발휘한 곳은 영국이다. 2000년 강도 사건에서 영국 수사팀의 법보행 분석 결과가 세계 최초로 법정 증거로 채택돼 유죄 판결이 나왔다. 캐나다에서도 총기 살인 사건에서 법보행 분석으로 유죄가 선고된 사례가 있다. 국내에서는 2013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자택 화염병 투척 사건’에 처음 활용됐다. 당시 영국의 법보행 분석 전문가 헤이든 켈리를 초청해 CCTV 영상에 포착된 피의자의 걸음걸이를 분석했다.

법보행 연구 기술은 기존 수사 기법으로 찾아낼 수 없는 범인을 걸음걸이 분석을 통해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정도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디지털분석과 연구사는 “이번 표준화 연구를 통해 법보행 수사에 좀 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며 “법정 근거로서 걸음걸이 자료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 법보행 ::


범죄 현장을 담은 영상의 화질이 안 좋거나 범인이 얼굴을 가리는 등 위장으로 신원 확인이 어려울 때 걸음걸이에 나타나는 특성을 분석해 용의자와 동일인인지를 판단하는 과학 수사 기법.
 
용인=송경은 동아사이언스 기자 kyunge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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