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미현]“술김에 그랬다”면 성폭행도 봐줘야 하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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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김에 실수’에 관대한 사회, 음주 성폭력에 형법은 감경규정
취하면 폭력은 더 과격해지는데… 피해자 두 번 죽일 일 있나
폭력범죄 대부분이 음주범죄… 취하면 봐주는 인식부터 바꿔야

이미현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미현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는 주취 상태에서 벌어진 일탈 행위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여 왔다. 맨정신으로는 쉽사리 용납되기 어려운 행동이라도 술로 포장되면 문제 삼는 쪽이 오히려 쪼잔한 사람으로 몰리기 일쑤다.

이렇게 술에 대한 관대한 문화가 죄질이 나쁜 범죄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애써 눈감아 왔던 것 같다. 2015년 경기 의정부시에서 발생한 폭력범죄를 분석한 논문에 따르면, 폭력범죄의 62.4%가 음주범죄였고 특히 죄질이 나쁜 성폭력은 67.9%, 가정폭력은 73.1%가 주취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고 한다. 최근 전남 신안군 섬마을에서 벌어진 불행한 사건 역시 예외가 아니다.

형법은 심신미약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해 형을 감경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음주로 인한 일시적인 심신미약은 항상 감경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폭력·성범죄에 대한 대법원의 양형기준에 따르면, 범행의 면책사유로 삼기 위해 고의로 술을 마셨다면 가중 처벌 대상이다. 또한 음주 시 범행의 고의가 없었더라도 과거 경험, 당시 신체 상태나 정황 등에 비추어 만취 상태에 빠지면 타인에게 해악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도 감경되지 않는다. 자신의 술버릇을 알고도 절제하지 않는 사람은 감경받기 어렵다는 얘기다.

하지만 고의적으로 심신미약을 초래한 것은 아니고 과거에 유사한 일탈행위가 있었던 것도 아니라면, 일반 원칙에 따라 범행 당시 실제로 심신미약 상태였는지 따져볼 수밖에 없다.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술 취한 상태에서 성폭력 범죄를 범한 때에는 감경 규정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규정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감경 조항 적용을 금지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여전히 음주 성폭력 범죄에 대해 감경 규정이 적용될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많은 경우 취한 상태에서는 범행이 과격해지기 때문에 피해자는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한 상태라는 이유로 감경된다는 것은 사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음주폭력 범죄자에게는 아예 형을 감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거나 또는 음주 전력을 양형 가중 요소로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고려하면 십분 이해되는 주장이다.

이런 범죄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심신미약 여부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극형에 처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모든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킬 수는 없으므로 결국 언젠가는 이들도 사회로 복귀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장기 수감으로 인한 교정 효과가 미미할 뿐 아니라 사회 적응력을 떨어뜨려 재범 위험성을 높이는 부작용만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너무 뻔한 얘기 같지만 그래도 최선의 대책은 범죄 예방이다. 그렇다면 폭력범죄의 대부분이 음주범죄라는 점이 확인된 이상, 이제는 정말 잘못된 음주문화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사실 술은 적절하게 마시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불편한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만들어 주는 등 장점도 많다. 모든 폐해는 적절한 선을 넘어가면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걸 누가 모르겠나 싶지만 막상 술잔이 돌기 시작하면 희한하게도 그걸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상대방의 주량이나 건강 상태를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강권하는 것은 좀 심하게 말하면 독을 먹이는 행위인데도 이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없을 뿐 아니라 거절조차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다. 그래서 본인의 의사에 반해 선을 넘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보니 음주로 인한 일탈 행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너그러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더 심각한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여성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술을 강권하는, 소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음주문화가 퍼지면서 안 그래도 성범죄에 취약한 여성들이 더욱 취약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지만, 범죄에 취약한 사람이 늘면 범죄율이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슬픈 현실이다.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난 이후에 가해자를 가중 처벌한다고 피해자의 아픔이 과연 얼마나 덜어질 수 있겠는가?

술 권하는 사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과도한 음주에 대해 지나치게 너그러운 우리의 인식 자체를 바꾸어 가는 것이다.

이미현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주취 상태#폭력 범죄#음주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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