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학대 넘치는데… 의료인 90%는 신고 안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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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폭력 노인학대]<上> 고령화시대, 늘어나는 학대 실태

고령화 추세 속에 노인학대 피해자가 늘어나고 있지만 치료 과정에 학대를 의심한 의료인 10명 중 9명은 학대 신고를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동아일보와 대한노인병학회가 ‘노인학대 예방의 날’(15일)을 맞아 5월 28, 29일 학회 소속 의료인 100명을 대상으로 노인학대 인식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22%는 노인학대 의심 환자를 만났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 중 68%(15명)는 신고를 전혀 하지 않았고 23%(5명)는 ‘대부분’ 신고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항상 신고했다’와 ‘대부분 신고했다’는 답변은 각각 1명에 불과했다. 신고하지 않은 이유로 △원인 불분명(12명) △신원 노출로 인한 보호자의 항의나 보복 우려(9명) △경찰서 출두 등 성가신 업무 걱정(9명) 등의 응답이 많았다.

 
▼ 실직 아들이 때리고… 봉양 딸이 괴롭히고… 64만명 눈물 ▼

#장면 1. 경기도에 사는 A 할머니(86)는 올 초 50대 초반인 아들 B 씨가 실직한 후 이혼까지 하면서 함께 살게 됐다. 실직 후 B 씨는 하루 종일 인터넷만 하면서 술을 마셨다. A 할머니가 이를 질책하자 B 씨는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더니 어느 날부터 어머니를 때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웃의 신고로 노인보호전문기관 직원이 출동했지만, A 할머니는 “우리 아들이 원래 착했는데 직장을 잃더니 이렇게 됐다”면서 “불쌍한 내 새끼 잡아가지 마라”라며 목 놓아 울었다.

#장면 2. 서울에 사는 C 씨(58·여)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인 D 할머니(88)에게 “너 미쳤어?”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당장 밖에 나가 죽어라” 등의 욕설을 수시로 한다. 욕설의 시작은 D 할머니가 치매에 걸린 후 쓰레기를 집에 쌓아 두는 습관이 생기면서부터. C 씨는 “쓰레기를 모아 오는 엄마를 볼 때마다 너무 화가 나 욕을 하기 시작했는데 점차 강도가 세졌다”며 “손이 올라가는 걸 참은 적도 많은데 이러다가 정말 엄마를 때리게 될 것 같아 두렵다”고 토로했다.

○ 가해자 딸 비율 높아져도 대안 없어

15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노인학대 인식의 날’이다. 우리 정부도 지난해 말 노인복지법 개정을 통해 이날을 ‘노인학대 예방의 날’로 지정했다. 고령화의 영향으로 노인학대가 지속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생겨난 조치다.

2014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 10명 중 1명은 학대받은 경험이 있다. 경찰이 추산한 노인학대 피해자는 64만 명이나 된다. 하지만 2015년 기준 노인학대 신고 건수는 1만1905건이고 이 중 3818건이 노인학대로 판정됐다. 노인학대 실태에 비해 신고율 및 판정 건수가 매우 적은 편이다.

노인학대의 원인은 경제적 부담, 가치관의 충돌, 치매 및 기저 질환에 대한 장시간 병시중에 따른 스트레스 등이 뒤섞여 나타난다.

권금주 서울사이버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여전히 가정 내 학대 상당 부분은 아들이 저지르지만 과거보다 딸이 부모를 봉양하는 비율이 늘어나면서 딸에 의한 학대 비율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부모가 치매 등으로 아플 때 딸이 주로 맡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학대가 나타나면 마땅히 보살필 사람이 없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현실적 판단이 쉽지 않다는 점도 문제다.

‘2014년 노인학대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노인학대 가해자는 아들이 38.8%로 가장 많았고 배우자(15.2%), 딸(12.3%), 본인(11.9%), 요양원 등 시설(7.4%) 순으로 나타났다. 친족에 의한 학대가 74.3%나 된다. 배우자에 의한 학대는 2005년 156건에서 3배 이상인 588건으로, 딸에 의한 학대는 같은 기간 283건에서 1.5배 이상인 476건으로 늘었다. 김지순 경기북부노인보호전문기관 실장은 “노부부만 따로 사는 가구가 많아지면서 배우자, 특히 남편의 학대가 급증하는 추세”라며 “과거의 가정폭력이 노인학대로 이어진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형별 비율은 정서적 학대(37.6%)가 가장 많고 신체적 학대(24.7%)와 방임(17%), 경제적 학대(9%), 자기방임(8%), 유기(1.4%) 순으로 나타났다. ‘2015년 노인학대 현황보고서’는 14일 발표된다.

○ 아동의 4분의 1인 노인학대 예산

이현민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 부장은 “최근의 아동학대 사건으로 사회적 약자 학대를 막자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면서도 “노인학대가 아동학대에 비해 원인이나 형태, 해결책 등이 훨씬 더 복합적이지만 정부 지원 등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아동학대는 노인학대에 비해선 사건의 형태와 해결책이 간단하다. 문제의 원인이 대부분 과도한 폭력성, 분노조절 장애, 빈곤 문제 등을 가진 가해자(부모)에게 있다 보니 아동을 분리한 후 가해자의 상황과 문제를 개선한다.

하지만 노인학대는 더 복합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고, 가해자가 자신과 보호자를 학대할 수도 있으며, 오해가 학대를 부르기도 한다. 70대 아들이 기저 질환으로 90대 노모를 방임하면 분명 학대지만, 학대로 아들을 처벌하고 모자를 분리하기는 어렵다. 또 “아들이 대학교수인데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신고해 조사해 보니 월급 100만 원의 시간강사인 경우도 있었다.

학대 이후 노인보호전문기관 등에서 조치를 할 때도 피해자가 성인이기 때문에 본인이 원치 않으면 적극 개입하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다. 자식에게 맞아도 자신이 살던 집에서 계속 있겠다고 주장하면 분리할 수 없다.

정부의 지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노인학대 관련 예산은 아동학대의 4분의 1 수준이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은 2016년 현재 중앙 1곳, 지역 56곳인데, 4곳을 추가로 만들 예정이라 올해 말이면 총 61곳이 된다. 쉼터는 총 48곳. 예산도 국비와 지방비를 합쳐 406억 원에 이른다. 하지만 노인보호전문기관은 중앙 1곳, 지역 29곳이고, 쉼터는 16곳이며, 예산은 총 128억 원에 불과하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노인학대#의료인#신고#고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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