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은/이해준]완주 이치재 無名의병 추모비, 늦었지만 다행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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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자들의 기록과 왕후장상의 공훈이 중심이고, 벼슬 없고 힘없는 백성의 역사는 그저 이야기뿐일 때가 많다. 424년 전 임진왜란 당시 완주군 대둔산 기슭 이치재 전투의 현장에는 전라도 관찰사였던 권율 장군의 충렬사와 황진 동복현감의 승전비만 빛나고 있을 뿐 장렬하게 순국한 무명 의병 400명의 순국묘나 순국비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애국신념 하나로 익산에서 거병한 이름 없는 의병들은 군량, 무기, 훈련, 지원 병력도 없이 왜군 장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점령군의 무장 조총 병력 1만여 명과 하루 종일 공방의 백병전을 벌이다 머리 귀 코가 잘리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당파색이나 줄서기와는 거리가 먼 이들 무명 의병은 흙숟가락 물고 태어나서인지 추숭에서 항상 뒤편에 서 있었고 멀어져 갔다.

늦었지만 완주군에서는 이들 무명의 순국열사들을 챙기고, 역사 현장인 완주 이치에 추념비를 세워 순국 영혼을 위로하는 해원의 시간을 마련했다. 조원래 순천대 명예교수 등의 연구 성과와 지역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19일 추념비 제막식을 갖게 된 것이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귀중한 모습이다.

호남 의병과 전라수군의 활약상에 엄청난 전력 손상을 입은 왜군은 전주성 공격을 영원히 포기하고 1592년 9월 경상도 성주를 거쳐 계령 쪽으로 철수하였다. 호남지방의 교두보인 완주의 이치와 웅치는 국난 극복의 근거지이자 국가의 보장처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말처럼 호남지방 특히 완주의 역할과 전략적 위치는 중차대했다. 이렇게 이치, 웅치, 금산 무명 의병들의 뜨거운 충의는 호남과 조선을 지켜낸 국력이었다.

정말 늦었다. 그러나 424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그 역사적 평가와 정신, 긍지와 자부심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해져 새로운 정신력, 활력으로 되살아나길 기대한다.

이해준 공주대 사학과 교수


#완주#추모비#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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