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de GyengBuk]天倫·人倫까지 지키는 종가문화의 깊은 맛… 군자의 품격 흐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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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宗)의 정신]온고지신의 산실 경북

지난달 28일 서울 호텔신라에서 ‘수운잡방’을 중심으로 열린 종가음식 활성화 행사. 왼쪽부터 이석준 미래창조과학부 차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김도은 광산 김씨 종부, 김원동 종손, 김관용 경북지사, 김광림 새누리당 국회의원.
지난달 28일 서울 호텔신라에서 ‘수운잡방’을 중심으로 열린 종가음식 활성화 행사. 왼쪽부터 이석준 미래창조과학부 차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김도은 광산 김씨 종부, 김원동 종손, 김관용 경북지사, 김광림 새누리당 국회의원.

지난달 28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종가 음식과 관련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가 음식 조리서인 ‘수운잡방(需雲雜方)’을 신라호텔의 상징적 한식요리로 만든 것이다.

방향은 ‘미미정례(味美情禮)’ 즉 멋스러운 맛(味), 아름다운 맛(美), 인정스러운 맛(情), 예의바른 맛(禮) 등 네 가지다.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를 비롯해 이석준 미래창조과학부 차관 등이 참석해 큰 관심을 보였다. 단순한 새로움(창조)이 아니라 멋지고 아름답고 인정스러우며 예의바른 새로움을 종가 음식을 통해 창출하겠다는 발상이다.

수운잡방은 경북을 중심으로 꽃핀 유교문화의 깊은 멋과 맛이 담긴 요리서다. 그것도 ‘남자’가 펴냈다는 점에서 당시 여성의 전유물 같던 음식에 대해 예사롭지 않은 배경이 느껴진다. 경북 안동시청에서 도산서원 쪽으로 20분가량 가면 와룡면 ‘오천군자마을’이 있다. 수운잡방의 저자 김유(1491∼1555)의 고향이다. 이 마을은 광산 김씨 집성촌으로 600여 년의 전통을 이어온다. 종손은 김원동, 종부는 김도은 씨이다.

김유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며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정성껏 대접했다. 수운잡방은 이 과정에서 익힌 솜씨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121개 항목으로 된 내용 가운데 술빚기 등 술 관련 내용이 많다. 손님맞이를 즐긴 그에게 선비들의 발길이 잦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운잡방의 그윽한 멋과 맛은 ‘수운’이라는 이름에서 풍겨 나온다. 김유가 얼마나 깊은 인문적 소양을 갖추고 이를 음식에 녹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평소 그와 교류한 퇴계 이황(김유보다 10세 아래)이 그의 재능을 아끼며 훗날 묘비명을 쓴 사실을 보더라도 그렇다. 퇴계도 김유가 만든 술과 음식을 즐겼을 것이다.

수운은 주역의 수괘(需卦)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은 ‘구름이 하늘 위에 있는 모습이 수괘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마시고 먹으며 잔치를 열고 즐긴다(雲上於天需, 君子以飮食宴樂·운상어천수, 군자이음식연락)’이다.

수괘는 진실함과 인내심으로 적절할 때(상황)를 기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시고 먹으며 잔치를 열고 즐긴다는 말은 흥청망청하며 헛되이 세월을 보낸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이 바르게 될 때를 살피면서 심신을 편안하게 다스리며 능력을 키우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수운에 담긴 유도(儒道)이다. 군자(됨됨이가 반듯한 사람)가 올바른 삶과 세상을 추구하려면 우선 건강해야 한다. 이를 위한 필수적 요건이 바로 음식이다.

김유에게 음식은 입을 즐겁게 하고 배를 채우는 생물적 수단에 그치는 게 아니라 군자다움을 위한 수양이고 수신(修身)이다. 수운잡방의 음식은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넘어 사람에 대한 예의의 피어남이다. 종(宗)의 실천이다.

100년 후 경북 여성 장계향(1598∼1680)은 첫 한글 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음식 맛을 아는 여러 가지 방식)을 펴냈다. 경북의 남성과 여성이 400∼500년 전에 나란히 으뜸 요리서를 남긴 전통은 종의 정신이 깊이 숙성된 태도와 실력에서 가능했다. 정의(올곧음) 신명(신바람) 화의(어울림) 창신(나아감)이라는 경북 정신은 수운잡방과 음식디미방 같은 요리서에도 스며 있다. 공동체를 살리고 성장시키는 영양분인 셈이다.

올해 8월 21일∼10월 18일 신라 고도 경주에서 열린 ‘실크로드 경주’도 경북 정신의 발현에서 가능했다. 2013년 터키에서 열린 ‘이스탄불-경주 세계문화엑스포’를 계기로 실크로드 문명에 대한 집요한 탐구에 따른 결과였다. 실크로드의 동쪽 출발지인 경주의 역사적 가치를 살려 우리의 문화영토를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대하는 신바람이요 어울림이며 나아감이다. 유엔 세계관광기구(UNWTO)가 후원한 이 행사에는 145만 명이 찾아 실크로드의 개방적 교류 정신을 느꼈다. 관람객 68%가 ‘가족’이었다.

경북도가 지난해 11월 시작한 ‘할매할배의 날’도 경북 정신에서 피어난 가족공동체 회복 노력이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손주가 부모님과 함께 할매(할머니) 할배(할아버지)를 찾는다. ‘나-부모-조부모’의 3대 천륜(天倫)이 느슨해지거나 단절되지 않도록 고민 끝에 창출한 새로움이다. 불효방지법 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농어촌은 고령화되며 도시는 핵가족화되는 현실을 윤리적 힘으로 극복해 보려는 강한 의지다. 올곧은 어울림이라는 경북 정신의 저력(바탕힘)이 작동해야 가능하다. 확산되면 가족 및 세대 갈등을 비롯한 사회적 문제도 인륜적 바탕에서 해결책을 찾는 기반이 될 수 있다.

경북도가 국토의 막내인 독도와 독도의 어머니인 울릉도를 천륜과 인륜의 차원에서 잠시도 잊지 않고 지키는 노력도 경북 정신에서 자연스레 솟아나는 힘이다. 경북도청 현관에는 독도의 24시간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영상이 있다. 2층 계단 벽에는 대형 독도 그림이 걸려 있다. 이는 잠시도 독도와 떨어지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이다. 뿌리 깊은 성숙함에서 솟아나는 종의 저력, 종에서 뻗어나오는 경북 정신(올바름 신바람 어울림 나아감)! 700년 만에 이전하는 경북도청은 경북의 도읍지이고 종가이다.

‘경북인’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의 인품과 역량을 평가하면서 “자기 몸을 잊고 국난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평소 쌓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런 우직하고 성실한 쌓음(축적)이 바로 종의 뿌리 내림이요 바탕이며 근본이고 전통이다. 문화재의 20%가량이 경북에 있는 이유도 이런 바탕에서 가능했다.

경북 출신의 고승 일연이 군위군 인각사에서 저술한 ‘삼국유사’(국보 306호)의 8만9354자에 대한 판각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전국의 각수(刻手)들이 2017년까지 3개 판본을 목판에 새길 계획이다. 이 또한 훗날 소중한 문화재가 될 것이다. 과거를 발효시켜 미래를 만드는 온고지신이요, 새롭게 나아가는 경북정신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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