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저욕망 사회’의 귀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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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오피니언팀장
이진 오피니언팀장
#1.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맏손자가 입소한 신병 훈련소로 부고가 전해졌다. 중대장은 전화로 유족에게 조부의 별세 사실을 꼼꼼히 물은 뒤 훈련병에게 휴가를 내줬다. 그런데 중대장은 통화 말미에 아버지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장례식이 끝나거든 아드님을 훈련소 앞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훈련병이 아무 생각 없이 제시간에 복귀하지 못해 탈영병이 될까 봐 불안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중대장이 다 큰 아이를 맡은 어린이집 원장 같았다”고 말했다.

#2. 기러기 남편이 쓰러져 한쪽 몸에 마비가 왔다. 외로움과 부실한 건강관리가 원인인 듯했다. 외국에 있던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급히 귀국했다. 남편이 돈을 보낼 수 없게 됐고 간병해줄 사람도 구하지 못해 유학을 접은 것이다. 병실을 찾은 아내는 남편을 보며 ‘그만하길 다행이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같이 온 큰아들은 보조침대에 앉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느라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몸만 큰 아이들’을 둘러싼 풍경이다. 어른들은 듣기만 해도 헛웃음을 웃거나 깊은 한숨을 내쉴 법하다. 하지만 주변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10, 20대가 제법 많다. 이들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도, 장차 되고자 하는 목표도 뚜렷하지 않다. 그냥 부모나 학교, 조직이 요구하는 대로 몸을 맡긴 채 하루하루를 보낸다.

왜 이렇게 됐는지 여러 가지 원인을 따질 수 있겠다. 산업화 시대에나 맞을 틀에 박힌 교육, 문턱이 너무 높아져 버린 취업시장, 그 밑에서 쉼 없이 이어지는 무한경쟁…. 생존 기술을 강조하는 부모의 간섭도 하나의 원인일 듯하다. 로드매니저나 다름없는 엄마의 간섭과 관리에 아이의 꿈은 규격화된다. 나만의 꿈을 키워 마음껏 뻗어가고 싶은 욕구는 억눌린다. 항변이라도 할라치면 ‘네가 뭘 안다고 그래’라는 호통을 듣기 십상이다. 아이들은 점점 작아져 스마트폰 화면으로 퇴각하고 만다.

부모들은 힘겹게 일해 자녀들에게 안온한 환경을 마련해줬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자리를 도약대로 삼기보다 주저앉아 버렸다. 저명한 경영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치는 일본 사회를 ‘저욕망 사회’라고 진단했다. 결혼도, 출세도, 책임도 싫어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 일본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이다. 어느새 우리 젊은이들도 차츰 희망을, 이상을 품지 않고 있다.

꿈을 꾸지 않으면 결국 꿈 자체가 사라진다. 꿈 없는 세대 앞에는 좌절의 강이 흐르고 있다. 강 여기저기에는 터지기만을 기다리는 분노의 기뢰(機雷)들이 떠다닌다.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슬람국가(IS)의 잦은 테러도 꿈이 없는 이슬람 젊은이들을 숙주로 삼고 있다. 자신들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 주류를 향해 키우는 맹목적 분노는 테러의 자양분이다.

우리 현실이 이렇게 된 데는 과거 386세대를 포함한 어른들 책임이 크다. 경제학자 우석훈이 ‘다음 세대의 문제 절반 정도는 386세대가 부모가 되면서 생겨났다’고 한 지적이 틀리지 않다. 386세대가 이런 현실을 만들려고 공부를 하고 고시를 보고 거리를 내달렸던 것은 아닐 터이다.

그렇다면 이 답답한 현실을 뚫고 나가는 일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1, 2년 뒤에 쓰일 지식도 필요하지만 평생을 이끌어줄 지혜를 함께 일궈야 한다. 정치의 혁신이나, 경제구조의 개선은 이 지혜가 뒷받침될 때 더 효과적이다. EBS가 최고의 교사로 선정했던 하영철 수학 교사의 말은 그래서 울림이 크다. “학생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질책이 아니라 그 고뇌와 분노를 표출할 방법을 마련해 주는 것이며 목표를 의식하되 그에 속박되지 않는 지혜를 길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진 오피니언팀장 leej@donga.com
#욕망#경쟁#부모#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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