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경기/동서남북]유커 유치 명분으로 ‘문화 말살’ 안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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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제·인천취재본부장
박희제·인천취재본부장
“송도국제도시 내 ‘트라이볼’을 관광객 전용 상설공연장으로 바꿔야 하겠습니다.”

인천문화재단이 최근 인천시 관광 실무를 총괄하는 간부에게서 이런 내용을 구두로 통보받고 아연실색하고 있다. 해설이 있는 음악회, 시민 참여형 공연, 퓨전국악, 현대무용, 낭만음악회, 청소년 문화예술교육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는 복합문화공간을 송두리째 내줘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

2009년 세계도시축전 기념관인 트라이볼은 호수 위에 뜬 미확인비행물체(UFO) 형상의 독특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으며, 고 백남준 작품전시장과 가수 비의 뮤직비디오 배경이 됐던 송도국제도시의 명물이다. 인터넷 가입 회원이 3200명에 달해 공연 때마다 온라인 선착순 예약이 조기 마감되고 있다. 지난달 28∼30일 펼쳐진 유료 재즈페스티벌 공연도 연일 만석이었다. 트라이볼은 시민들에게 ‘문화 갈증’을 해소해 주는 송도국제도시의 유일한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인천시는 이런 여건을 감안하지 않고 최근 유정복 시장이 거둔 중국인 관광객(유커·遊客) 15만 명 유치 성과의 후속 조치로 상설공연장 조성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다. 지역 문화예술계와 충분한 협의를 거치지 않은 채 성과주의에 매몰된 모습을 보이자 곳곳에서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우선 인천시 문화예술 담당자들이 문화콘텐츠 개발 의지가 있는지 큰 의구심이 일고 있다. 트라이볼에 상설 작품으로 올리려는 논버벌 퍼포먼스 ‘비밥’은 인천시와 중구가 매년 10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중구문화회관에서 지난해부터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공연하고 있지만 객석이 썰렁한 경우가 많다. 세월호 침몰 참사,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여파까지 겹쳐 객석 점유율이 평균 30%를 밑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130여 회를 넘는 비밥 공연을 본 외국인 관람객이 1만3000명가량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중구는 주민 여가시설인 문화회관을 더 이상 비밥 전문공연장으로만 대관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인천에 관광객을 위한 상설공연장은 필요하다. 그러나 시민과 밀도 있는 교감을 나누는 예술 공간을 강탈하다시피 하려는 발상은 ‘문화 말살’과 다름없다.

또 인천에 뿌리를 둔 문화관광상품을 개발하려는 노력도 해야 한다. 최근 부평아트센터에서 공연한 창작뮤지컬 ‘미추홀에서 온 남자’나 중구 신포동 소극장 무대에 올려진 ‘해연(바다제비)’은 인천 공연예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미추홀…’은 비류백제에서부터 대몽항쟁, 임진왜란, 개항, 6·25전쟁 등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지구로 내려오는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다.

‘해연’은 일제강점기 유치진 선생과 쌍벽을 이룬 인천 출신 희곡 작가 함세덕 선생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토착성이 배어 있는 이런 작품에도 비밥과 같은 기획력 높은 작품과 함께 상설공연 기회를 줘 문화관광상품의 경쟁력을 키워 나가게 할 시점이다.

박희제·인천취재본부장 min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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