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정승호]‘5월 광주’는 분열을 원치 않건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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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호·사회부
정승호·사회부
5·18민주화운동 34주년을 앞두고 본보 17일자 커버스토리 ‘못다 푼 한(恨) 못 씻은 죄(罪)’ 기사를 보고 몇몇 독자가 e메일을 보내왔다. “광주의 한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줄 몰랐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5월 광주’의 또 다른 아픔을 알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경기 수원에 사는 한 독자는 “광주가 왜 ‘임을 위한 행진곡’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알고 싶다”며 “‘임을 위한…’ 제창 문제를 놓고 광주가 갈등과 분열의 모습으로 비쳐 안타깝다”고 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올해 5·18민주화운동 기념식도 ‘상주’격인 유족회원과 부상자, 구속자 등이 불참한 채 ‘반쪽 행사’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임을 위한…’의 주인공 윤상원 씨(당시 30세)는 ‘1980년 5월 광주’를 온몸으로 보여준 희생자 중 한 명이다. 전남대를 졸업한 그는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투사회보’를 발행하고 시민대책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10일간의 항쟁을 이끌었다. 그는 그해 5월 26일 전남도청에 모여 있던 남녀 중고교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로지 민주주의를 찾기 위해 무고한 시민들이 피를 흘리는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이제 집으로 가라. 이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 전해라. 오늘 우리는 패배하지만 내일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윤 씨는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 2층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짧은 생을 마감했다. ‘임을 위한…’은 그로부터 2년 뒤 만들어졌다. 1982년 2월 망월동 5·18묘역에서 ‘영혼결혼식’이 열렸다. 신랑은 윤상원, 신부는 신랑의 ‘들불야학’ 동지로 1979년 노동현장에서 숨진 박기순 씨(당시 23세)였다. 둘의 영혼을 기리는 곡을 쓰고 가사를 붙인 이 노래는 1980년대 대학가에서,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외침으로 되살아났다.

1997년 정부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승격시켰다. ‘임을 위한…’은 계엄군의 총칼 아래 스러진 광주 원혼을 달래는 넋풀이 노래로 채택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기념식부터 이 곡은 퇴출됐다. “대정부 투쟁을 고취시키는 노래가 정부 기념식에서 불려지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이유였다.

광주시민이 안타까워하는 것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한 태도다. 올해 기념식의 공식 슬로건은 ‘5·18 정신으로 국민 화합 꽃피우자’였다. ‘국민 화합’은 보수와 진보를 떠나 모두가 공유해야 할 가치다. 광주는 더이상 ‘5월’로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세월호 참사의 아픔까지 더해진 5월, 온 국민과 함께 이 노래를 부르고 싶은 것이다.

정승호·사회부 shjund@donga.com
#5.18#광주#임을 위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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