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붕 4세대’… 몸살난 대기업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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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세대, 베이비부머, X세대, 해외파

최근 국내 A 대기업의 신임 부장 교육장. 새로 승진한 200여 명의 부장 앞에 난데없이 커다란 칸막이가 등장했다. 칸막이 뒤에는 이 회사의 신입사원들이 앉았다. 목소리까지 철저하게 변조한 검은 실루엣들은 평소 부장들에게 갖고 있던 불만을 쏟아냈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서로의 속마음을 알고 싶을 때 자주 활용하는 ‘실루엣 토크’ 방식이었다.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에겐 발언 기회도 안 주면서 회의는 반드시 길게 해야 하나요?”

20, 30대 사원들의 볼멘소리가 이어지자 몇몇 부장은 흥분해 “내가 언제 그랬느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교육을 진행한 인사팀 관계자는 “그동안 개인 대 개인의 문제로만 인식했던 세대 갈등을 처음으로 공유하는 자리였다”며 “고성이 오가는 모습을 보면서 심각한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세대 갈등을 치유해야겠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회 갈등 요인인 세대 갈등이 기업에서도 골칫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산업화 세대부터 해외파 ‘기러기 자녀’까지 경험과 가치관이 판이한 세대들이 공존하면서 사내(社內)에선 크고 작은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세대 갈등도 방치하면 조직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리스크’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세대 단절과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기업의 주요 과제가 됐다.

현재 한국 기업에는 4개 세대가 공존하고 있다. 1970년대 산업화 시기 직장생활을 경험한 1세대(1955년 이전생)가 고위직에 일부 남아 있다. 그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출생한 ‘베이비 부머’가 2세대다. 주로 부장∼임원급에 포진한 이들은 기업이 고속 성장하는 시기를 함께하며 회사의 중추 역할을 맡았다. 이어 민주화와 글로벌화를 겪으며 1, 2세대와는 전혀 다른 경제적 풍요 속에서 자란 3세대 직장인(1960년대 후반∼1970년대생)들이 입사했다. ‘X세대’로 불리며 신세대의 시작을 알린 이들이다.

▼ “회사 위해 야전침대 생활” vs “일방적 지방근무-야근 못해” ▼

○ 국내 기업 ‘한지붕 4세대’

마지막 4세대는 현재 일반 사원이나 대리급인 1980, 90년대생들이다. 연령대로 보면 베이비 부머의 자녀 세대이자 2000년경 본격화한 ‘기러기 아빠’(해외유학을 하는 자녀 및 부인과 떨어져 국내에 홀로 남은 아버지)의 자녀들이다. 어학실력이 뛰어나고 해외 친구들과 온라인으로 소통하는 이들은 글로벌 네트워크가 강하다. 형제가 적고 귀하게 커 칭찬받는 문화에 익숙하며, 자신을 중시하는 ‘자아도취증후군’을 보이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인터넷을 접해 대면(對面)보다는 메신저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소통에 더 익숙하다.

미국은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기업 내 ‘다세대 공존 시대’가 열렸다고 보고 이들이 한 직장에서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왔다. 전문가들은 한국은 미국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전쟁, 민주화, 디지털화까지 엄청난 변화를 압축적으로 겪었기 때문에 세대 갈등이 극단적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 변화가 급격한 만큼 각 세대의 경험이 너무나 달라 국내에서 세대 갈등은 극심하게 표출될 수 있다”며 “이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하는 수직적인 기업은 유능한 인재를 놓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세대 갈등 얼마나 심각하기에

올해 초 국내 B그룹의 한 계열사는 부장과 임원들에게 실리콘으로 만든 ‘분노 팔찌’를 나눠줬다. 평소 한 팔에 차고 있다가 부하 직원에게 화가 나 소리를 지를 것 같은 순간, 팔찌의 고리를 풀어 반대쪽 팔에 차라는 것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심리학이나 조직행동론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라며 “팔찌를 옮겨 차며 버는 시간에 화를 가라앉히고 한 번 더 생각한 뒤 말하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런 고육책까지 짜낸 것은 얼마 전 이 그룹의 다른 계열사에서 발생한 폭언 e메일 사건 때문이었다. 한 상사가 ‘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폭언을 담은 e메일을 신세대 직원에게 보냈고, 분개한 직원이 “이런 대접을 받으며 회사를 다닐 수 없다”며 e메일 전문을 인사팀에 보낸 것이다. 상사가 징계를 받는 것으로 일단락됐지만 이 기업은 세대 갈등이 조직 전체를 흔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경험했다.

신입사원들의 높은 퇴직률도 세대 갈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대한상공회의소가 2011년 1980년대생 대졸 신입사원 340명을 조사한 결과 ‘직장생활을 하면서 상사나 선배와 갈등을 겪는다’는 응답은 72.9%였다. 이들이 조직문화 중 가장 바뀌었으면 하는 점은 일방적인 의사소통(36.7%), 비효율적 업무 관행(27.9%), 연공서열형 평가와 보상(16.8%), 개인보다 조직을 중시하는 분위기(16.5%)였다. 특히 이들 가운데 ‘이직을 준비하거나 진행 중이다’라고 답한 사람은 42.0%였고 ‘이직 의향이 있다’고 말한 사람은 55.9%였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미국경영자협회의 분석을 인용해 “직원 한 명의 이직에 따른 회사의 경제적 손실은 직무와 직급에 따라 이직자 연봉의 50∼250% 수준에 이른다”며 “신입사원의 조기 이직은 경제적으로도 큰 손실”이라고 분석했다.

○ 기업 조직문화 변해야


최근 한 국내 대기업 임원들 사이에서는 “(서울) 강남 출신 명문대 졸업생들이 문제”라는 평가가 회자됐다. 회사가 지방근무나 야근을 지시했는데 따르지 않는 ‘문제 직원’들을 보면 하나같이 배경 좋고 학벌 좋은 신세대 직원이었다는 것이다. 회사 내에선 “학벌이 좀 떨어져도 로열티가 높은 직원을 뽑아야 한다”는 의견이 득세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시각은 다르다. 회사를 위해 ‘야전침대 생활’을 불사했던 50대 임원들의 눈에는 요즘 신세대가 문제로 보이겠지만 진짜 문제는 직원이 따르기 어려운 방침을 강요하는 회사라는 얘기다. 글로벌 헤드헌팅 기업 러셀레이놀즈의 고준 상무는 “지방근무, 야근을 하는 직원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미국과 달리 한국 기업들은 세계적 수준의 인재를 값싸게 부리면서 경쟁력을 발휘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내 주요 대기업 인사관리의 주안점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주요 관심사가 일 못하는 직원의 성과를 관리하는 데에서 수직적 수평적 의사소통을 활성화하는 쪽으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HR 컨설팅 업체인 머서코리아에 따르면 최근 대기업이 요청하는 컨설팅 및 강연의 70% 정도는 세대를 아우르는 조직 운영방안 등 리더십, 소통에 관한 내용이다. 박형철 머서코리아 대표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치고 젊은 소비자를 만족시킬 감각과 글로벌 기업에 맞는 마인드를 가진 신세대 직원들을 지켜낼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전했다.

김지현·김용석 기자 jhk85@donga.com
#대기업#세대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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