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알린뒤 악몽의 나날… 이제 마음 놓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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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평화대학 피해 학생들, 인권위 시정권고에 안도

가만히 지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피해자가 더 많이 생길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다른 피해자가 연락하면 언제든 돕기로 결정했다. 교수가 자신에게만 그런 행동을 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자신 말고도 다른 피해자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처음부터 이렇게 나설 마음은 아니었다. 작년 9월 유엔평화대학(유피스) 아태센터의 A 교수에게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한 직후 B는 더이상 다니지 않았다. 국제기구 진출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입학한 지 1주일 만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올해 3월, 다른 학생과 연락하다가 A 교수 얘기를 들었다. “나만이 아니었구나….” 용기를 냈다. 두려움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 의심하는 버릇까지 생겨

B는 MT에서 당한 일을 지난달 국가인권위원회에 알렸다. 구석으로 불러 어깨를 주무르던 순간, 집에 가겠다고 나섰는데 따라와서 손을 잡던 장면, 버스정류장에서 갑자기 껴안고 볼에 뽀뽀를 하던 모습….

다른 여학생도 비슷한 내용을 진정서에 담았다. C는 “교수가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에서 손을 잡아 깍지를 낀 뒤 주머니 속에 넣었다. 해외에 출장 갔을 때는 잘 곳이 없으면 자기 호텔에서 자라고 했다. 자신에게 시집오라고 한 적도 있다….”

언젠가는 낯선 여성이 전화를 걸었다. “유피스 학생인데 한 번 만나자.” B는 같은 피해자인 줄 알고 응하려 했다. 뭔가 사연이 있다고 생각해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왜 자신을 만나려는지 다시 확인하려는데 상대방은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도움을 좀 줄 수 있냐”고만 얘기했다. 뭔가 미심쩍어 전화를 끊었다. 다른 학생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A 교수와 가까운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문제의 여성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제야 “(A) 교수님이 모함을 당하고 있다. 도움을 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다. 피해자인 줄 알았던 여성이 알고 보니 사건을 무마하려는 교수와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소름이 끼쳤다. B는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집 근처의 지하철역 출구를 알려준 점이 마음에 걸렸다. 후회됐다. A 교수가 그 여성과 함께 집 근처에 나타날지 몰라 벌벌 떨었다. 이때부터 지하철이 아니라 버스를 탔다. 불가피하게 지하철을 이용해야 할 때는 일부러 집이 아닌 다른 방향의 출구로 나갔다.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마다 느꼈다. 이래서 성추행 피해 사실을 쉬쉬하는구나. 피해 사실을 괜히 알렸던 걸까….

어느 날에는 교수가 직접 문자를 보냈다. 일생일대의 위기에 빠져 있으니 도와달라는 얘기였다. B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교수가 연락할 때마다 MT에서의 악몽이 떠올랐다. 교수의 이름이 휴대전화에 뜨면 하루 종일 기분이 불쾌했다.

전에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와도 잘 받았다. 일을 겪으면서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택배기사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가 상품을 늦게 받으면 화가 났다.

○ 인권위 진정도 문제 삼아

C 역시 피해 사실을 알린 뒤 고통을 겪었다고 회상했다. 특히 사건이 불거진 뒤 유피스 AP재단이 임명한 교학과장 정모 씨의 e메일을 잊지 못한다.

정 씨는 발령 직후 ‘문제 진상 파악을 위해 진상위원회 출석 요청 건’이라는 e메일을 보냈다. 비밀리에 진상을 파악하는 중이니 재단 이사회가 구성한 진상위 조사에 응하라는 내용이었다.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협박을 받는 느낌이 들어 불쾌했다.

얼마 후에는 더 황당한 일이 생겼다. 유피스 AP재단의 이사가 C의 집으로 서류를 보냈다. 학교 내에서 사건을 해결하지 않고 제3기관에 의뢰한 것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했다.

같은 내용의 서류는 다른 피해자 D의 집에도 도착했다. 그는 화가 나서 곧장 인권위를 찾아갔다고 기자에게 전했다. “평소 알지 못하던 재단 이사진에까지 피해자들의 집주소와 정보가 유출됐다는 것에 놀랐다.”

그 역시 교학과장에게서 이사회의 진상조사에 관한 e메일을 받았다. D는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협박 투의 e메일을 받는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면 헤아리기 어렵다. 이사회가 자체 구성한 진상위에 출두해 진술하라고 해서 불쾌했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성추행과 성희롱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주변에서 알아주지 않는 현실이 괴로웠다. 특히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으로 아태센터의 다른 학생이 얘기할 때마다 상처를 받았다. D는 기자에게 전했다. “평화와 인권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면 이번 사건을 다른 사람이 인권을 침해당하는 걸 모두의 문제로 생각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 학교 폐쇄되면 시정조치는?

인권위의 권고가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인권위는 성희롱이 확인된 단체나 기업의 감독기관에 시정조치를 권고한다.

아태센터는 국제조약기구이자 고등교육기관이라고 주장했지만 코스타리카의 유피스 본부는 사실이 아니라고 동아일보에 밝혔다. 형식적으로 센터의 감독기관은 유피스 AP재단이다. 문제는 재단 설립을 주도하면서 이사진을 섭외한 인물이 성추행과 성희롱의 가해자인 A 교수라는 점이다.

본보 취재 결과 대부분의 이사진은 재단이나 센터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사실상 A 교수가 전권을 가진 셈. 이런 상황에서 인권위가 AP재단에 시정조치를 권고해도 A 교수를 제재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인권위는 시정조치를 권고만 할 수 있지 명령이나 강제할 순 없다.

교육부가 다음 달 초 아태센터를 폐쇄할 예정이라는 점도 변수다. 인권위는 다음 주에 권고 결정문을 보낼 예정이다. 문서가 도착한 직후에 센터가 폐쇄되면 결정문대로 시행할 대상이 없어진다.

성추행 및 성희롱 의혹에 대해 A 교수는 지금까지 “나를 몰아내기 위한 날조극”이라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우리가 바라는 점은 상급기관의 엄중하고 객관적인 조사 결과를 따르는 일이다. 진실이 밝혀지기만을 바란다”고 거듭 밝혔다.

인권위는 학생들의 손을 들어줬다. 국가기관이 교수의 가해행위에 대해 공식적인 판단을 내렸다는 의미가 있다. B는 “이제야 발을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아태센터를 졸업하고 국제기구에 진출하려던 계획은 잠시 접어야겠지만….

▼ “기자가 다니던 학교서… 침묵할 수 없었다” ▼

■ 본보기자, 펜을 들기까지


기자는 유엔평화대학(유피스) 아태센터 교수의 성추행과 성희롱, 불법적 교육기관 운영을 3일부터 7차례 보도했다. 취재와 기사 쓰기가 힘들었다. 아태센터를 다니는 25명 중 한 명이었기에.

국제대학원을 알아보다가 아태센터에 들어갔다. 언젠가는 외교와 국제 문제를 심층취재하고 싶어서였다. 올해 3월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기사를 쓸 줄은 전혀 몰랐다. 동료 대학원생들에게는 “난 이곳에 기사 쓰러 온 게 아니니 학생으로 봐 달라. 조용히 공부만 하겠다”고 말했다.

사건을 처음 접한 건 지난달 초였다. 내 주변에서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학생대책회의에 참석했다.

문제의 교수를 개강파티와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금전협박 사건이니 동요 마세요”라는 문자를 보냈다. 피해자들은 “돈 얘기는 꺼낸 적이 없다”며 펄펄 뛰었지만 교수는 당당했다. 그는 매주 1회인 ‘평화와 갈등’ 과목을 계속 가르쳤다. 진상조사팀에 참여한 교수는 해임됐다.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한 학생은 퇴교당했다. 펜을 들지 않으면 직무유기라고 생각했다.

기사를 쓰는 일은 부담스러웠다. 다른 기자에게 제보해서 쓰게 하면 어떨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자료를 넘겨준들 현장에서 직접 보고 겪은 나보다는 자세하고 정확하게 쓰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학위 대신 기사를 선택했다.

취재하다가 아태센터가 국제조약기구도, 고등교육기관도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태센터와 직간접 관계를 맺은 전현직 고위 관료 및 저명인사들은 “센터의 성격과 실체가 애매모호하다는 말을 외교부와 교육부 관계자들로부터 들었다”고 기자에게 전했다.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부 당국이 지금까지 실태를 조사하거나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에 더 놀랐다. 정확히 말하면 거창한 조사가 필요 없는 사안이었다. 기자가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e메일을 보내자 유피스 본부는 이틀 만에 명쾌한 답변을 보냈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유엔평화대학#성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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