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신문박물관 들여다보기]태극기에 덮여 떠난 베델을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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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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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베델(한국명 배설)은 1904년 조선에 와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1909년 죽은 그를 추도하는 글을 담은 만사집(왼쪽)과 대한매일신보사에 걸려 있었던 태극기. 신문박물관 제공
영국인 베델(한국명 배설)은 1904년 조선에 와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1909년 죽은 그를 추도하는 글을 담은 만사집(왼쪽)과 대한매일신보사에 걸려 있었던 태극기. 신문박물관 제공
신문박물관은 자료적 가치에 따라 일부 유물을 소중히 관리합니다. 1부에 수백만 원 이상인 신문이나 값을 매기기 어려울 정도로 소중한 신문관련 자료가 관람객을 맞이합니다.

예를 들어 신문박물관에는 7점의 문화재가 있습니다. 어떤 자료가 문화재로 등록됐을까요. 박물관에 전시 중인 문화재를 살펴볼까요?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문자보급운동 관련 교재와 배설의 만사집(輓詞集), 배설의 유품이 언론사 자료로는 처음으로 2011년 12월에 문화재로 등록됐습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한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1872∼1909·한국명 배설(裵說)·사진)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크로니클(the Daily Chronicle)지의 특별통신원으로 조선에 왔습니다. 그는 통신원에서 해임된 이후에도 조선에 머물며 양기탁 신채호 선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여 항일투쟁의 대변자 역할을 했습니다. 신문박물관에는 그가 간직했던 태극기와 영국기가 있습니다.

이 태극기는 대한매일신보사에 게양됐었습니다. 배설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관을 덮었다고 알려졌습니다. 태극기의 형태가 완전히 정착되기 전이라 태극과 궤의 위치가 현재와 다릅니다.

영국기는 태극기와 함께 대한매일신보사 사옥에 게양됐습니다. 일본경찰과 헌병대가 침범할 수 없는 치외법권적 지역임을 상징합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항일운동과 독립, 언론자유의 상징으로 평가되어 문화재로 등록됐습니다.

배설의 만사집은 1909년 5월 1일 배설이 3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그를 추도하며 전국 각지에서 답지한 만사 259편을 모아서 정성껏 엮은 책입니다. 민족운동가 박은식 및 양기탁과 같은 저명인사를 비롯하여 언론인, 교사, 종교인은 물론 시골의 이름 없는 촌부까지 참여했습니다.

양기탁 선생은 ‘대영 남자가 대한에 와서(大英男子大韓衷) 한 신문으로 어두운 밤중을 밝게 비추었네(一紙光明黑夜中) 온 것도 우연이 아니건만 어찌 급히 빼앗아갔나(來不偶然何遽奪) 하늘에 이 뜻을 묻고자 하노라(欲將此意問蒼窮)’라고 하며 통탄의 마음을 담아 애도했습니다.

만사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며 지은 글을 말합니다. 고인의 생전 업적과 인품, 행적을 기리며 문집으로 제본을 하기도 했습니다. 만사 원문을 모아놓은 문헌은 이례적이고 희귀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배설 만사집은 개회기 이후 우리나라 언론사와 민족 운동사뿐 아니라 국어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습니다.

신문박물관 이현정 연구원
#베델#대한매일신보#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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