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형삼]한국 외교의 ‘6개월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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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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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논설위원
이형삼 논설위원
1945년 4월 12일 밤, 술잔을 부딪치던 해리 트루먼 미국 부통령이 백악관의 호출을 받는다. 영문을 모르고 달려가니 대통령 부인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서거를 알렸다. 트루먼이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루스벨트 여사가 물었다. “당신을 도울 일이 없을까요? 큰일이 난 건 당신이니까요.”(닉 래곤 ‘대통령의 결단’) 트루먼은 석 달 전 부통령에 취임해 백악관 사정에 캄캄했지만 루스벨트의 유업(遺業)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밀어붙였고 8월, 2발의 원폭 투하로 2차대전을 끝냈다.

한 장의 사진이 있다.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에서 워싱턴DC로 돌아가는 미 대통령 전용기.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존슨 부통령이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재클린 케네디 여사가 참담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본다. 불과 2시간 전, 암살된 남편을 끌어안았을 때 입고 있던 피 묻은 원피스 차림 그대로다. 대통령의 유고(有故)로 충격에 빠진 국민에게 정부의 안정과 연속성을 암시하는 사진이다.

우리는 5년마다 대통령의 유고와 진배없는 레임덕으로 국정 공백을 경험한다. 국방개혁, 차기 전투기사업, 공기업 정부 지분 매각 등 이명박 정부 막바지의 굵직굵직한 현안들이 안갯속으로 빠져들었다. 골격이 완성된 4대강사업이나 법적 판단이 끝난 제주해군기지도 다음 정권에서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 모른다. 5년 단임 대통령제 탓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정부의 ‘연속 작동 장치’를 손봐야 할 일이다.

김태효 대통령대외전략기획관이 한일 정보보호협정 파문으로 사퇴하자 이 협정은 물론 그가 주도하던 한미 미사일협상과 북핵 업무, 한중 자유무역협정까지 차질을 빚게 됐다고 한다. 그가 30대 때부터 이명박 서울시장의 외교안보정책 자문에 응해 ‘소년 책사(策士)’로 불렸다곤 하나, 대통령도 외교장관도 안보수석도 아닌 청와대 참모 한 사람의 ‘유고’로 외교 현안의 연속성이 흔들린대서야 될 말인가. 청와대에서 여러 차례 근무한 전직 외교 관료는 “비서 하나가 그 많은 사안을 틀어쥐고 있었다면 MB 정부가 외교정책을 시스템이 아니라 점조직으로 운영했다는 의미”라며 혀를 찼다.

청와대는 김 기획관의 후임자감을 못 찾아 고민하고 있다. 직업공무원을 앉히자니 외교통상부 국방부 통일부 국가정보원 등 실무 부처에 휘둘릴 것 같고, 외부에서 데려오자니 ‘6개월 시한부 정권’에서 김 기획관처럼 ‘영웅 아니면 역적’이 되겠다는 뚝심으로 소신껏 일할 인물이 안 보인다. 실무 부처에선 “결국 주요 현안들은 다음 정권으로 넘어가는 것 아니냐”는 회의론이 나오고 있다.

아시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신경전이 치열하다. 그 틈에 일본은 재무장을 노린다. 북한 권부의 속사정은 종잡기도 어렵다. 지금 우리 외교는 ‘6개월 병가(病暇)’를 낼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선거운동에 매달려 있어도 미국 외교엔 휴일이 없다. 국무부 장차관 6명이 동시에 세계 각지로 순방 외교를 나설 정도다. 미국은 탈냉전과 9·11테러 이후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외정책 기조가 비슷해져 정권이 바뀌어도 연속성이 흐트러질 여지가 작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대선주자들이 새겨들을 만한 충고를 했다. “새 정부에서도 쌈박한 아이디어를 꺼내들고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정치적 야망을 감춘 그들의 ‘겉포장’에 유혹되기 쉽다. 반면 팀워크로 일하면서 차근차근 설명하는 관료들에겐 별 흥미를 못 느낄 거다. 대통령의 역할은 양쪽 모두에 귀를 열고 조율해 큰 흐름을 잡아 주는 것이다.”

이형삼 논설위원 hans@donga.com
#외교#휴가#오늘과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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