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경기/인천人, 인천을 말한다]<11>이기인 노인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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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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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희생하고 이웃 챙기는 도시 그립다”

이기인 대한노인회 인천시연합회장은 14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혼자 있으면 책을
읽고, 둘이 있으면 우정을 나누고, 셋이 있으면 합창을 하는 아름다운 인천을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박선홍 기자 sunhong@donga.com
이기인 대한노인회 인천시연합회장은 14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혼자 있으면 책을 읽고, 둘이 있으면 우정을 나누고, 셋이 있으면 합창을 하는 아름다운 인천을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박선홍 기자 sunhong@donga.com
‘작은 거인’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대한노인회 인천시연합회 이기인 회장(85)은 단신임에도 기풍은 기자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전주 이씨로 17대가 살아온 인천 서구 심곡동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시절부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광복을 1년 앞둔 17세 때의 일이다. 일제의 검찰에서 일했던 동네 친구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모아놓은 책자(조서)를 입수했다. 이를 독해하려고 7, 8명이 모였다. 혈기왕성했던 그들에게 이 책은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찍 경찰에 발각됐다. 새벽에 경찰서로 연행되었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죄명은 ‘인천기계폭탄 사건’(현재 인천 동산중학교에 위치한 다이너마이트 창고를 습격하여 폭탄을 탈취해서 인천 숭의동 전동에 있는 발전소를 파괴함으로써 인천을 암흑화해 항일투쟁의 불씨를 일으키려 했던 사건) 획책 기도 혐의였다.

“물고문 등 고초를 당하고 서울 서대문형무소 소년감방에 미결수 상태로 들어갔지요. 황국신민으로 살라는 회유를 하더군요. 지금도 저를 연행했던 한국인 형사, 일본 판검사의 이름을 줄줄이 외웁니다. 젊은 날 오기가 생기더군요. 그때 민족의식이 생겼습니다.”

이후 그는 회유와 협박을 수차례 받다가 석방됐다. 서울에 있었던 대화숙(大和塾·일제강점 말기인 1941년 일제가 조직한 단체로 조선인 독립운동가, 공산주의자 등 사상범을 집단 관리하고 관찰하며 전향시키기 위한 사상교화단체)에서 사상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 몽양 여운형을 만나고 광복을 맞았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하다가 간부들의 감투싸움에 환멸을 느껴 인천으로 돌아왔다. 27세에 결혼할 때 주례가 죽산 조봉암이었던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죽산의 모습을 묻자 “악수를 하면 손이 간질간질했다. 죽산 선생 손가락이 엄동설한에 형무소에서 동상으로 뭉개져 짧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애국청년단체에서 일하다 당시 이승만 정부가 장려한 염전사업에 뛰어들었다. 1000m가 넘는 제방을 쌓고 사업을 벌였지만 7차례나 둑이 무너지는 등 고생을 했다. 자리를 잡아 사업이 번창하자 그는 사회봉사에 눈을 돌렸다. 국제로터리클럽에 가입해 총무 총재를 역임했고 지용택 선생과 의기투합해 당시 국내에서는 드문 시민의 자발적 문화단체인 새얼재단 창립에도 일조한다. 45년간 부성염전을 하다가 인천대교가 세워지면서 사업을 접었다. 보상금을 받자 2007년 인천로터리클럽과 새얼재단에 각각 1억 원씩 기부했다. 그 외 문화단체 적십자사 등에 수차례 수천만 원씩 내놓는 ‘키 작은 아저씨’가 됐다. 그는 새얼문화재단 고문직을 맡고 있다.

1994년 67세에 인천노인회 부회장이 되면서 노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부회장에 2차례, 회장에 4차례 피선돼 임기가 끝나는 2014년이면 노인회 활동이 20년이 된다. 무엇이 그를 기부와 봉사의 인생을 살게 했을까. “논어 학이편(學而篇)에 나오는 말입니다만 ‘매일 세 가지를 반성하라. 남을 위할 때 정성을 다하였던가, 벗들과 신의를 다하였던가,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을 남에게 전하지는 않았던가’라고 하지요. 자기 위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말고 이타(利他)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약속과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노인회 사업을 물었다 “노인회는 노인들의 여가선용을 위한 모임입니다. 노인은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손에게 존경만 바라지 말고 봉사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지요. 또 소비하는 노인이 아니라 생산하는 노인으로 사회를 책임지는 노인이 되자는 것이지요.” 그가 강조한 ‘누구라도 할 일이면 내가 하자, 이따가 할 일은 지금 하자, 같은 일이라면 좀 더 잘하자’는 말은 인천노인회의 3대 지표가 됐다.

“옛날 인천은 정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정감이 사라지고 자기 이익만 챙깁니다. 후배들을 보듬어 안고 싶은데 피하는 것 같아요.”

그는 인성이 중요하다며 “인천이, 혼자 있으면 책을 읽고 둘이 있으면 우정을 나누고 셋이 있으면 합창을 하는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인천시원로자문회의 위원이기도 한 그에게 재차 구체적으로 인천을 말해보라고 했다. “제가 80세가 넘은 인천 토박이인데 인천엔 왜 이렇게 향우회가 많은지 모르겠다. 아직도 인천은 척박하다. 정치나 경제적 이득 때문인지 자기를 희생하고 이웃과 나라를 생각하는 공선후사(公先後私) 정신이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따뜻한 햇살이 사무실로 쏟아져 오는 오후였다.

박선홍 기자 su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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