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 악몽, 그 후 1년]“죽은 소 제사뒤 새식구 60마리… 이놈들 보며 다시 일어서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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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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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도살처분’ 유영범-정부임 씨 부부의 희망찾기

지난해 12월 ‘눈물의 구제역 살처분 일지’가 인터넷에 게시돼 안타까움을 전했던 경기 파주시 부일농장. 구제역으로 소 120마리를 묻었던 농장주 유영범 씨의 부인 정부임 씨가 24일 오후 새 출발을 다짐하며 자식 같다는 소와 환한 얼굴로 입을 맞추려 하고 있다. 파주=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지난해 12월 ‘눈물의 구제역 살처분 일지’가 인터넷에 게시돼 안타까움을 전했던 경기 파주시 부일농장. 구제역으로 소 120마리를 묻었던 농장주 유영범 씨의 부인 정부임 씨가 24일 오후 새 출발을 다짐하며 자식 같다는 소와 환한 얼굴로 입을 맞추려 하고 있다. 파주=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올해 9월 중순 어느 날 유영범 씨(70)와 부인 정부임 씨(63) 부부는 소가 좋아하는 음식을 바리바리 챙겼다. 달콤한 과자부터 사탕과 생나물까지. 소들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자랑 파주막걸리까지. 지난해 12월 소 120마리를 묻었던 ‘무덤’ 앞에서 한바탕 곡을 하고 준비한 제물을 땅에 뿌렸다.

“‘미안하다 얘들아’ 하고 몇 번이고 외쳤죠. 생매장시켜 놓고 다시 키울 수밖에 없는 사람의 업보를 용서하라고 죽은 소들에게 빌었죠.”

유 씨 부부의 아들 동일 씨(38)가 ‘눈물의 구제역 살처분 일지’라는 제목의 글로 도살처분 상황을 인터넷에 올려 국민적 안타까움을 불러왔던 바로 그날의 소들이다.

24일 오후 경기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부일농장. 우사는 송아지 60마리의 ‘음매’ 소리로 가득했다. 지난해 12월 24일 기자가 방문했을 때 생석회가 뿌려진 채 텅 비어 있던 모습과는 크게 달랐다. 사료를 먹이통에 붓자마자 송아지들은 주인의 손까지 삼킬 기세로 달려든다. 부인 정 씨는 “다시 소를 키우게 될지 꿈에도 몰랐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 부부는 지난해 12월 21일 키우던 소 120마리를 모두 ‘예방적 도살처분’했다. 구제역에 걸린 녀석은 없었지만 하필 소를 출하했던 트럭이 구제역 발생 농장을 다녀온 차량이었다. “아무 병도 없는 녀석들, 약 놓고 죽여서 파묻었으니 어떻게 다시 키울 생각을 했겠어.”

목덜미에 주사를 놓는 방역요원의 품으로 파고드는 송아지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정 씨는 실신했다. 모두 부부가 받아낸 녀석들이었다. 방역요원도 통곡하며 밤새 소 120마리 목에 주사기를 찔렀다.

부일농장의 도살처분 내용을 보도한 본보의 지난해 12월 25일자 지면.
부일농장의 도살처분 내용을 보도한 본보의 지난해 12월 25일자 지면.
다시 소를 키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부는 지난해 겨울 소를 묻고 올해 봄까지 바깥출입을 삼가며 지냈다. 마당에 나갈 때마다 보이는 텅 빈 축사 모습에 질끈 눈을 감고 다녔다. 소를 먹이던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나왔다가 ‘아차’ 하고 돌아온 날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아내의 거듭된 설득에 남편이 졌다. 집에만 틀어박힌 남편을 보다 못한 정 씨가 다시 소를 키우자고 했다.

“이러다가 우리가 죽겠다 싶었어. 그래서 결심했지.”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나라에서 1억5000만 원을 빚지고 부부는 또 그렇게 시작했다.

▼ “작년에 죽은 새끼 돌아온 기분” 기쁨속 ▼
“구제역 재발공포에 FTA까지…” 시름도


이번에 소를 들일 때는 마치 처음 보는 동물처럼 신기했다. 20년 넘게 소만 길러 왔지만 이번 소들은 특별했다. 밥 먹고 우사 돌고, 또 밥 먹고 우사를 맴도는 생활이 계속됐다. 정 씨는 “작년에 죽은 새끼가 살아 돌아와 너무 기뻐 울고 있는 기분”이라고 했다. 소들 옆에서 부부의 일상을 들려주기도 하고 “건강하거라” 하고 타이르기도 한다.

녀석들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부부는 밤잠을 설친다. 9월에 융자 받아 10월 초 새로 들여온 송아지들에게 감기가 퍼지자 바로 수의사를 불렀다. 수의사에게 “한 마리도 안 죽이면 이놈들 다줄 터이니 제발 살려만 주시오”라며 애원했다. 다행히 모두 건강해지자 부부는 송아지 두 마리 값을 쳐서 수의사에게 줬다. 정 씨는 “이제 소를 땅에 묻는 것은 두 번 다시 상상하기조차 싫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희망을 안고 다시 시작했지만 걱정은 아직 남아 있다. 바람이 차가워지면서 다시 지난겨울 구제역의 공포가 엄습하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축사를 돌고 구제역균이 싫어한다는 불을 피우며 송아지의 상태를 점검하지만 두려움을 쉽게 떨치기는 힘들다.

“그나마 지금은 모두 백신을 맞혀 예방적 도살처분이니 그런 건 없어져서 다행이지. 병 걸리는 녀석만 죽인다는데 그러면 억울하지는 않잖아. 그래도 다시 (구제역이) 돌지 않을까 하루하루 무섭고 걱정이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소값 하락이라는 반갑잖은 소식도 들려온다. 정 씨는 “최상급 30개월짜리 소 시세가 요즘은 600만 원 정도”라며 “최소 800만 원은 되어야 이익이 될 텐데 고민”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다시 소를 키운 이유를 물었다.

“사람이잖아. 아무리 모진 일이 닥쳐도 이놈들 보고 다시 일어서야지. 아무렴.” 이제 9개월 된 송아지들을 쓰다듬는 부부의 손길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물건을 만지는 것처럼 정성스러웠다.

파주=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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