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개’는 오늘도 北을 넘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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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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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내부-국경지대에 조직원… 돈받고 편지-물품 전달

올여름 개봉한 영화 ‘풍산개’의 주인공은 남북을 넘나들며 물건은 물론 사람도 ‘배달’해준다. 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스토리는 단순히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니었다. 동아일보 취재팀의 확인 결과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남한과 북한, 중국 국경을 넘나드는 수많은 ‘풍산개’들이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남북으로 흩어진 1000만 이산가족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민간 연결고리다. 특히 최근에 북한이탈주민이 2만 명을 넘어 2만3000여 명 선까지 늘면서 ‘풍산개’는 점차 남북 간 이산가족을 연결하는 새로운 사업모델로까지 떠오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을지로 남북이산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모 씨(64)와 40대 조선족은 남북을 오가며 이산가족 간의 소식을 전달하는 풍산개로 활동하는 인물들이다. 이달 말 중국으로 출국할 예정인 조선족은 “중국 정부에 알려지면 곤란하다”며 신원 공개를 거부했다.

혈혈단신 휴전선을 넘는 영화 속 주인공과 달리 이들은 조직을 이뤄 활동한다. 점조직은 보통 4∼6명 정도로 이뤄진다. 한 조직은 남한 조직원 1명과 중국 국경지대 조직원 1명, 북한 국경지대 조직원 1명, 그리고 북한 내에서 활동하는 조직원 1∼3명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1호, 2호, 3호 등으로 불린다. 김 씨는 “북한에선 민간인이 함부로 각 도의 경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에 의심받지 않으려면 각 지역 말씨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조직원을 여럿 둬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 내에서 활동하는 조직원들은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잡화상으로 위장하고 다닌다.  
▼ 4단계 점조직… 50만원 내면 北→南 편지 이틀만에 배달 ▼

점조직들은 주로 남한에서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전하는 생필품과 의약품을 전달하거나 남북 간 서신 왕래, 돈 전달 같은 일을 한다. 협의회 심구섭 대표(77)는 “물품이나 서신을 전달하는 일은 일단 주소만 확인되면 비교적 수월한 편”이라고 말했다. 다만 생사나 주소를 모를 경우 몇 년이 걸리는 일도 있다고 한다.

이들은 남북의 이산가족 상봉도 주선하고 있다. 상봉은 보통 북한 가족이 북-중 국경을 넘어 중국 국경지대로 나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남한 가족과 만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 경우 국경지대 북한군에게 “꼭 다시 북한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국경을 넘는다고 한다. 드물지만 국군포로나 탈북을 원하는 북한 주민을 빼내는 일에 나서기도 한다.

심 대표는 “한때 협의회 내 점조직이 12개에 달했지만 최근에는 민간교류 횟수가 급격하게 줄어 활발하게 활동하는 조직은 6개 정도, 조직원은 30∼40명”이라고 설명했다. 협의회는 1998년 설립 이후 음지에서 물품 및 서신왕래, 이산가족 생사확인, 이산가족 상봉까지 정부에서 하기 힘든 남북 간 민간교류를 맡아 왔다.

○ 이틀이면 가족 소식 전해

심 대표와 김 씨는 가장 최근 북한에서 온 편지를 기자에게 보여주며 “물품의 무게나 부피, 발신지에 따라 걸리는 시간은 다르지만 이 편지는 이틀 만에 내용이 전달됐다”고 말했다. 심 대표가 서랍에서 꺼낸 편지에는 ‘주체 100년 10월 9일’이라는 날짜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협의회 측은 “북한 내 활동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며 발송지는 함구했다.

편지 전달 과정은 이렇다. 북한에 살고 있는 조카는 남한의 큰아버지에게 9일 편지를 써 평안도에서 활동하는 조직원에게 건넨다. 편지를 받은 조직원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으로 가는 화물트럭 운전사에게 운임으로 중국 돈 150위안(약 2만7000원)을 주고 편지를 국경지역으로 보낸다. 화물트럭을 이용한 이유는 조직원이 직접 편지를 들고 국경으로 이동하다간 당국에 적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국경지역에서 조업하는 어선에 편지를 맡기기도 한다.

운전사는 미리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던 북한 국경 인근의 조직원을 만나 편지를 전달한다. 이 조직원은 즉시 중국 쪽 국경에서 활동하는 조직원에게 휴대전화를 이용해 연락한 뒤 만날 장소를 정한다. 국경의 조직원들은 주로 중국에서 개통한 휴대전화를 사용한다. 북한 당국의 전파 추적과 국경 인근 북한군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1, 2분씩 짧게 ‘토막 통화’를 한다. 통화하는 지역은 사방을 관찰할 수 있고 우물 등 물가가 있는 곳이다. 보위부에 발각되면 즉시 휴대전화를 물속에 던져버리기 위해서다.

휴대전화를 이용해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한 국경의 조직원들은 강폭이 좁고 군인들의 감시가 적은 두만강 일대에서 만난다. 북측 조직원은 편지를 돌멩이에 묶어 강 반대편으로 던지는 방법으로 편지를 전달했다.

편지를 건네받은 중국 국경지대의 조직원은 스캐너를 이용해 편지를 이미지파일로 만든 뒤 e메일로 남한의 조직원에게 보낸다. 남한 가족이 9일 발송된 편지를 e메일로 확인한 것은 11일 오후. 이틀 만에 북한에서 남한으로 편지가 도착한 셈이다. 편지 원본은 국제 특급 우편을 사용해 보내는데 보통 4∼7일 걸린다. 편지를 주고받는 비용은 건당 50만 원 정도다.

협의회는 최근 음지에서 이뤄지던 민간교류 활동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북오도신문 통일신문 함남일보 등 이산가족과 북한이탈주민이 보는 소식지에 광고를 내겠다는 것이다. 광고문안에 따르면 생필품, 의약품 등 최대 20kg까지 전달이 가능하며 기간은 최장 75일이 걸린다. 비용은 건당 50만 원이다.

고현국 기자 mck@donga.com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 풍산개 ::

김기덕 감독이 제작하고 전재홍 감독이 연출한 영화 ‘풍산개’는 남북을 오가며 이산가족의 편지나 비디오테이프를 포함해 사람까지 배달해 주는 가상의 인물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에서 북한산 ‘풍산개’ 담배만 피워 ‘풍산’이라고 불리는 남자 주인공은 이산가족의 부탁을 받고 3시간 만에 판문점에서 휴전선을 건너 평양에 가 물건을 전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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