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학술지에 논문게재 일념… 화물선 타고 美 건너가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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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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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SCI급 해외학술지에 논문 실은 윤덕진 연세대 명예교수

윤덕진 연세대 명예교수가 2001년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진료하는 모습. 그는 당시 여든이 넘었지만 후배들과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윤덕진 교수 제공
윤덕진 연세대 명예교수가 2001년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진료하는 모습. 그는 당시 여든이 넘었지만 후배들과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윤덕진 교수 제공
망국의 설움을 겪던 일제강점기,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절에도 국제적 수준의 논문을 쓰려고 열정을 불살랐던 연구자들이 있었다.

미국의 출판업체인 엘시비어는 전 세계 유명 학술지 1만2446종에 수록된 논문 정보를 수집한다. 이 회사의 데이터베이스인 ‘사이언스 다이렉트’에 따르면 연세대 의대의 이석신 교수(작고)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을 냈다.

그는 1930년 독일 학술지에 ‘실험용 동물의 영양 상태에 따른 불안정성’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한국인의 SCI급 논문은 1930년대에 2편, 40년대에 1편이 더 있지만 모두 고인이 됐거나 해외 대학에서 발표해 신원이 파악되지 않는다.

국내에 생존하는 학자 가운데서는 윤덕진 연세대 의대 명예교수(92)가 가장 먼저 SCI급 논문을 낸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 농촌 영유아 사망 실태 보고서’가 1957년 미국 소아과 학회의 학술지 ‘소아과 저널(The Journal of Pediatrics)’에 실렸다. 그는 1940년 연세대 의대에 수석으로 입학하고 4년 뒤에 졸업했다. 사회생활은 전북 군산 개정면의 농촌위생연구소 소아과 과장으로 시작했다. 정신없이 진료에 매진하다 출생 및 사망 통계가 부실하고 이와 관련된 연구는 거의 없는 현실에 아쉬움을 느꼈다.

영유아 사망실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뒤, 매일 오후 자전거를 타고 인근 지역 2000여 가구를 찾아다녔다. 어린이가 얼마나 태어나고 얼마나 죽는지를 주민들에게 일일이 물어본 뒤 1000명 중 6, 7명이 10년 안에 죽는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윤 교수는 “당시 미국의 영유아 사망률은 0.2% 수준이었다. 한국은 3배가 넘는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발로 뛰며 조사한 지 1년 만에 나온 논문은 1950년 ‘농촌 위생’이라는 국내 잡지에 실렸다.

한국 실정을 외국에 알리고 싶었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몰랐다. 그러던 중 미국에 살던 친척의 권유로 유학길에 올라 1954년부터 위스콘신대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다. 민간 항공이 없던 시절이라 화물선을 타고 보름이 지나서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혹시 미국 소아과 저널에 실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논문을 짐에 넣었다. 영어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정확히 번역하기는 쉽지 않았다. 혼자 영어로 옮긴 뒤 미국인 동료들에게 감수를 받았다. 수소문 끝에 미국 소아과학회 사무실 주소를 알아내 우편으로 보낸 뒤 1957년 여름, 한국으로 돌아왔다.

모교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의 소아과장으로 같은 해 7월부터 근무했는데 이듬해 초 국제우편이 도착했다. 소아과 저널 1957년 12월호였다. 국내에 게재한 뒤 7년이 지나서였다. 그는 “16쪽 분량을 편집진이 토씨 하나 고치지 않았다. 한국에 관해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어서 거의 그대로 실어준 것 같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연구보다는 개업을 선호하는 의료계 풍토를 아쉽게 생각한다. 해외 학술지에 훌륭한 논문을 실은 후배 교수에게 1987년부터 해마다 1000만 원을 지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국위 선양과 연구자 개인의 발전을 위해 학자들이 해외 학술지에 부지런히 논문을 내야 한다. 개업을 하더라도 꾸준히 연구하려는 의지만큼은 갖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고 조언했다.

이경희 기자 sorimoa@donga.com  
::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

학술정보 전문기관인 미국 톰슨사이언티픽사가 과학기술 분야 학술잡지에 게재된 논문 관련 내용을 담은 데이터베이스(DB). 미국 출판사인 엘시비어는 SCI급을 포함한 세계 유명 학술지의 논문 정보를 DB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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