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다함께/1부]<4>원스톱 지원시스템 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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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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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법률-언어 ‘3중벽’… 아이가 감기만 걸려도 ‘쩔쩔’

《 임신과 출산에서부터 국적을 취득하기까지 결혼 이주 여성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의료기관 이용은 이들이 한국사회에서 느끼는 높은 장벽 중 하나. 몸이 아파도 어디를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막막해하는 경우가 많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의사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나 가족이 사고라도 당하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애를 먹는다. 의사소통이 힘든 마당에 복잡한 법률문제에 부닥치면 더욱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이들이 한국에 들어온 뒤 겪었던 일을 인터뷰를 토대로 재구성했다. 》
○ 중국에서 온 안선녀 씨(33)

“남편분이 일하다 갑자기 뒤로 넘어지더니 일어나질 못하세요. 바로 응급실로 와주세요.”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2009년 봄. 중국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남편을 한국에서 다시 만나 결혼한 지 4년째였다.

서울 구로구에 자리를 잡고 낳은 첫아이는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랐다. 둘째아이를 가진 지 7개월 정도 됐다. 남편은 언제나처럼 경기 시흥시의 전자회사로 출근했다. 평소 감기 한번 걸린 적 없이 건강했던 몸이라 이국땅에서 쓰러졌단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불행은 벼락처럼 다가왔다.

전화를 끊고 병원으로 어떻게 갔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경황이 전혀 없는 상태로 대림역 근처의 병원에 갔다. 나는 한국어가 서툴렀다. 일상생활에서는 별 어려움 없이 한국어를 말하는 정도였지만 깊이 있는 대화는 힘들었다. 의사가 이런저런 설명을 했지만 불안한 상태라 의학용어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알아들은 말은 딱 하나뿐이었다. “수술하셔야 합니다.”

남편이 쓰러진 이유가 뇌출혈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다. 의료기관을 찾을 때 다문화지원센터 같은 기관에서 통역 서비스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접했다. 설령 그 사실을 알았다 해도 갑작스레 남편이 쓰러진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정신이 있었을까 싶다. 남편은 두 차례에 걸쳐 뇌수술을 받았다. 당시의 충격 때문인지 둘째는 8개월 만에 태어났다. 병원에서는 남편이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수술 후 몸놀림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말도 어눌해져서 일을 전혀 할 수 없었다. 다니던 회사도 관둬야 했다.

다행히 남편이 다니던 회사에서는 산업재해보상금으로 기존 월급의 일부를 지급한다고 했다. 관련 규정이 어떻게 되는지 담당자가 이야기해 줬지만 복잡한 서류에 어려운 용어가 많아서 애를 먹었다. 많은 말을 들었지만 “월급의 70%를 받을 수 있다”는 내용만 이해했다.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한 점이 많아도 물어보거나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관련기관, 담당자가 일을 처리하도록 전적으로 맡겨둘 수밖에 없었다.

둘째아이는 다행히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하지만 가족이 늘고, 원래 그리 많지 않던 남편의 월급은 더욱 줄어들어 생활을 꾸려 나가기가 벅차다. 남편의 병은 완치되지 않았다. 병원에 계속 다니며 약을 먹어야 한다. 집에서도 이유 없이 쓰러질 때가 있어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몇 년 뒤면 첫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모아둔 돈이 없어 걱정이다. 생활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싶어 얼마 전부터 동네 어린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친다. 하지만 차비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루를 보낸다. 근근이. 가장 큰 걱정은 앞으로다. 우리 부부나 애들이 또 아프면 어떻게 하나….

○ 베트남에서 온 Y 씨(23)

서울 영등포구에서 다섯 살짜리 아들을 키우며 남편과 함께 산다. 2006년 봄에 결혼하면서 한국에 오게 됐다. 요즘은 버스로 몇 정류장 거리의 다문화센터에서 베트남 친구들과 한국어 공부를 하고 생활정보를 나누며 지낸다.

생면부지의 나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 처음 발을 디뎠을 당시의 막막함은 아직도 생생하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남편밖에 없었다. 아는 사람도, 기댈 사람도. 시어머니가 계시지 않아 모든 일을 전적으로 남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한국어를 배우거나 다른 다문화가정 여성과 교류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정보가 없는 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말하면 “돈 내야 하는데 왜 하느냐”며 반대했다. 빠듯한 형편에 남편까지 반대하니 한국어를 따로 배우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1년 반이 넘도록 집에서만 지냈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 아찔한 상황이 많았다. 아이를 가졌을 때 4개월이 지나도록 임신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입덧이 심해지고 나서야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들었다. 임신 사실을 갑자기 알다니. 기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말이 통하지 않아 산부인과를 혼자서 다닐 수 없었다. 출산 전까지 세 번 정도 병원에 가서 진찰 받은 게 전부였다. 아이를 낳고 나서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혼자 겪고 처리했다.

아이가 갑자기 아플 때가 특히 힘들었다. 몸이 약해선지 아이는 자주 아팠다. 감기라도 걸리면 몇 달씩 낫질 않았다. 속이 바짝 바짝 타들어갔지만 남편 없이는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의사가 증상을 말하면 남편이 듣고 다시 내게 설명했다. 왜 아픈지, 어떻게 해야 나을지 등 물어보고 싶은 점이 많았지만 답답하게 지내야 했다.

2007년 말, 외출했다가 우연히 베트남 출신 여성을 만났다. 한국어를 무료로 가르치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잔병치레를 많이 하는 아이를 돌보느라 힘들었지만 찾아갔다. 한국어를 배우지 않고는 지내기 힘드니까.

남편은 “비싼 돈 주고 책도 샀는데 왜 아직 말을 못 알아듣느냐”고 타박하기도 한다. 하지만 베트남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서로 도울 수 있어서 감사하다. 보수적인 시부모 때문에 외부활동에 어려움을 겪거나 이혼을 앞두고 체류나 국적문제로 고민하는 친구가 많음을 알게 됐다.

한국생활은 훨씬 즐거울 수 있었다. 다문화가정을 위한 서비스를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말이다. 입국 직후의 생활은 되짚어 보기 힘들 만큼 외로웠다. 하지만 내게는 꿈이 생겼다. 얼마 전 동사무소에서 운영하는 직업교육 프로그램에 신청해서 자리가 나길 기다리는 중이다. 아이가 좀 더 자라고 한국어가 능숙해지면, 내 일을 갖고 싶다.


▼ 생활지원 서비스 강화하려면 ▼
지원센터 170곳 통번역 인력 확대… 언어별 의료-법률 매뉴얼 만들어야


다문화가정은 병의원을 이용할 때 답답해한다. 결혼이민자 973명에게 의료문제로 가장 힘든 점을 물었더니 ‘언어소통을 하지 못해 치료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대답이 22.7%(220명)로 가장 많았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다문화시대를 대비한 복지정책방안 연구’, 2009년).

전국 다문화지원센터 170여 곳에서 일하는 통번역 인력은 지난해 6월 현재 198명이다. 센터마다 한두 명밖에 안 된다는 얘기다. 몽골어(12명) 태국어(5명) 인도네시아어(3명)가 가능한 인력은 극소수였다. 김민아 여성가족부 사무관은 “결혼이주여성이 쓰는 언어가 다양한 데 반해 통번역사가 부족하다. 요청이 들어와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말했다.

의료뿐 아니라 법률과 행정 서비스도 마찬가지. 기본적인 어학능력은 물론 관련 지식이 부족하니 고충을 겪는 일이 잦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사업결과보고서(2009년)에 따르면 결혼이민자가 가장 많이 상담하고 싶은 주제는 체류와 국적취득 상담, 취업상담(55.8%)이었다. 다음은 부부문제(24.4%)와 자녀문제(7%). 이와 관련한 법률자문이나 상담은 대부분 외부인사의 특강 형식이어서 체계적이지 못하다.

전문가들은 의료 법률분야에서 사각지대에 놓인 다문화가정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다양한 언어의 통번역 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 다문화가정에서 주로 생기는 의료 법률 문제를 언어별로 상세히 정리한 매뉴얼을 발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충청도 경기도와 협약을 맺고 다문화가정을 위해 법률 상담을 하는 박연철 법무법인 정평 대표는 “다문화가정에서 주로 상담하는 국적 취득 관련 사항은 전문가의 검증을 거쳐 이해하기 쉽게 번역해서 배포해 주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에 먼저 들어온 이주민이 나중에 입국한 여성을 위해 멘터 역할을 하는 식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체계적인 한국어교육 프로그램도 중요하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도 관련 정보가 없거나 교재비 또는 교통비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혼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방문교육 프로그램을 여성가족부가 만들었지만 전체의 10% 정도만 이용한다.

최충옥 경기도다문화교육센터 소장은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언어능력이 필수지만 현재는 한국어 교재조차 통일되지 않았다. 이민자의 다양한 한국어 수준에 맞춰 효율적인 교재를 개발하고, 여러 곳으로 나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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