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구구 가축매몰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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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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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뭉술, 가옥-수원지-하천-도로 인접하지 않은 곳으로…
애매모호, 톱밥은 충분히 뿌려야… 배출구 적당한 간격으로…

10일 경기 남양주시의 한 구제역 가축 매몰지 현장에서 환경부 현장 조사단이 매몰 적정성과 환경오염 실태를 조사하고 있다. 사진 제공 환경부
10일 경기 남양주시의 한 구제역 가축 매몰지 현장에서 환경부 현장 조사단이 매몰 적정성과 환경오염 실태를 조사하고 있다. 사진 제공 환경부
“가옥 및 하천과 인접하지 않은 장소에 묻되… 배출구는 ‘적당한’ 간격으로… 톱밥은 충분히 뿌려야 한다.”

‘가축전염병예방법’을 기반으로 농림수산식품부가 제정해 전국 축산농가에 배포한 ‘구제역긴급행동지침’(2010년 10월 개정)과 ‘조류인플루엔자(AI) 긴급행동지침’(2009년 12월 개정)에 나오는 내용이다.

구제역, AI 확산 등 긴급 상황 시 축산농가와 지자체 공무원이 철저히 준수해야 할 매뉴얼이지만 모호한 내용이 많다. 전문가에 따르면 지침 곳곳에 정확한 수치가 없거나 ‘충분히’와 ‘적당히’ 등의 표현이 많은 반면에 내용이 복잡해 구제역 발생 현장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게 돼 있다는 것이다.

기자가 행동지침을 분석한 결과 매몰지 선정 항목은 “가옥, 수원지, 하천 및 도로, 집단거주지에 인접하지 않은 곳으로 사람과 가축 접근을 제한할 수 있는 장소”로만 나와 있다. 정확히 몇 m 이상 떨어진 곳이어야 하는지, 넓이를 구체적으로 몇 m² 내외로 해야 하는지, 경사 몇 도 이하의 평평한 곳이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규정은 아예 없다.

매몰방법도 “바닥에 비닐을 깔고 흙을 1m 덮은 뒤 그 위에 사체를 2m, 흙을 3.5m 순으로 쌓으라”고 적혀 있을 뿐 몇 m²에 소 몇 마리, 닭 몇 마리 등을 묻을 수 있다는 등 실제 매몰 작업을 할 때 기준으로 삼을 구체적인 지침이 없다. 이 밖에 “천막이나 비닐로 톱밥을 ‘충분히’ 포장해 고정하고” “배출구는 지면에서 ‘적당한’ 간격으로 돌출시키고” 등의 애매한 표현도 많았다. 하지만 농식품부 측은 “규정 자체는 완벽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 대충 묻어도 제재수단 없어 ‘똑같은 실수’ 해마다 반복 ▼

구제역 가축 사체에서 나온 침출수가 ‘심각한 환경재앙’을 유발할 가능성이 큰 가운데 환경전문가들은 “구제역, AI 긴급행동지침이 바이러스 확산 금지 등 방역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사후 환경오염에 대한 부분은 부족하다”며 “이를 보완해야 2차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매몰 시 지하수로부터 1m 이상, 하천이나 수원지 집단거주지로부터 30m 이상 떨어진 곳을 선택해야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매몰 매뉴얼에는 이 같은 규정이 아예 없다. 매몰 면적도 바닥은 폭 4∼5m, 상부는 폭 5∼6m 이상을 확보해야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지만 이 역시 지침에 없다. 환경부 관계자는 “지침에 ‘수시로’ ‘충분히’ 등의 표현보다는 몇 kg, 몇 번 등으로 구체적으로 규정해야 한다”며 “매뉴얼에 정확한 내용이 없다 보니 현장에서는 상황에 따라 대충 매몰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10일 현재 구제역 매몰지 4200여 곳 중 30%에 해당하는 1500곳 정도가 오염됐을 것으로 당국은 추정하고 있다.

또 행동지침에는 가축 매몰 후 매몰지 주변 300m 내 지하수, 토양 등을 검사하도록 돼 있지만 정작 환경영향조사 방법은 마련돼 있지 않았다. 또 ‘매몰 시 준비물’ 항목도 불도저 작업복 삽 철골 등만 나와 있을 뿐 ‘복토에 필요한 혼합토 몇 kg’ ‘가스 침출수 배출관 몇 m’ 등 환경오염 예방용 준비물 관련 내용도 없었다.

침출수가 지하수나 하천으로 흘러 들어가면 병원성 미생물, 식중독균, 질산성 질소 등이 수자원을 오염시킨다. 지난해 1월 구제역이 발병한 경기 포천 지역의 매몰지 주변 지하수 47곳 중 14곳(29.8%)에서 수질기준을 초과했다.

그나마 축산농가나 지자체에 비치된 행동지침마저 제대로 지키지 않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지침을 지키지 않고 엉성하게 매몰해도 특별한 제재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행정안전부 측은 “매뉴얼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한 명문화된 제재수단이나 벌칙 규정은 없다”며 “다급하게 매몰이 진행됐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해당 시군구 공무원에게 지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2차 환경오염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보니 똑같은 ‘실수’는 매년 반복되고 있다. 정부가 지난해 초 강화, 포천, 김제 등 구제역과 AI 발생지역 8곳을 조사한 결과 이미 강화지역에서 침출수가 유출됐다. 또 정부가 2008년 85만2600마리의 닭과 오리가 묻힌 지역 15곳을 조사한 결과 8곳에서 침출수가 확산됐다. 당시 정부는 “2차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매몰지 주변에 긴급조사를 하고 대안을 마련하겠다”는 대책 발표까지 했다. 서울대 농생명과학공동기기원 이군택 교수는 “형식적인 방역과 환경조사는 문제가 크다”며 “매립지 선정 등이 쉽지 않은 만큼 기존 방역에 대한 전반적인 재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편 10일 환경부 행안부 농식품부로 이뤄진 정부 합동조사단 6개 조(6인 1조)가 한강 수계 지역인 양평 남양주 춘천 원주 등 99곳에 대한 2차 환경오염 조사에 들어갔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김윤종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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