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헌재 ‘최고 사법기관’ 지위 물밑 신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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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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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간의 미묘한 물밑 신경전이 잦아지고 있다. 겉으로까지 파열음이 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두 기관의 권한 문제와 관련된 사안에서 사사건건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것. ‘최고사법기관’을 자임하고 있는 두 기관 내에서는 권한 문제에 있어서는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자존심 대결의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 헌재 “인터넷 허위글 처벌규정 위헌” vs 법원 “전기통신기본법, 명확성 원칙에 위배되지 않아”

헌재는 28일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인터넷, 휴대전화 등을 통해 허위사실을 유포한 사람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한 전기통신기본법 47조 1항에 대해 “‘공익’의 개념이 추상적이고 불명확하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 조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낸 ‘미네르바’ 박대성 씨는 이에 앞서 서울중앙지법에서 1심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을 냈다가 기각당한 바 있다. 당시 법원은 “‘공익을 해할 목적’은 사회전체의 이익을 해칠 목적이라는 의미로 명확성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 법원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시위 관련사범 등 이 조항으로 기소된 이들 가운데 일부에 대해 유죄확정 판결을 내린 상태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헌재의 위헌 결정은 사실상 이 같은 법원의 기존 판단을 일거에 뒤엎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법원 내부에서는 헌재의 위헌 결정에 대해 “유명세를 탄 ‘미네르바’ 박대성 씨가 헌법소원을 내지 않았다면 결론이 달라지지 않았겠느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헌재가 또다시 여론에 민감한 정치적 사법기관임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 대법원 “긴급조치 1호는 위헌” vs 헌재 “긴급조치는 법률에 해당돼 헌재가 심사했어야”

법원행정처의 한 간부는 박일환 법원행정처장이 9일 법조 출입기자들과 가진 송년모임에서 “다음 주에 재미있는 판결이 나올 테니 기다려 보라”고 귀띔했다. 그로부터 1주일 후인 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유신정권 시절 내려진 긴급조치 1호를 위헌으로 판단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재심을 청구한 오모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헌재는 이에 공식 반응을 내지는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는 대법원이 헌법과 법률의 중간적 성격을 띠는 대통령 긴급조치의 위헌 여부를 직접 판단한 데 대해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헌재 고위관계자는 “똑같은 사건이 2월 헌재에 접수돼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대법원이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했어야 매끄럽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긴급조치가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이 아니라는 형식논리를 내세워 직접 위헌 판단을 한 데는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헌재가 갖고 있는 법률에 대한 위헌심사권을 대법원이 침해했다는 얘기다.

헌재는 최근 서울고법이 경기도 선거관리위원회가 국민권익위원회를 상대로 낸 행정소송에서 ‘국가기관은 행정소송의 당사자가 될 수 없다’던 그동안의 판례를 깬 데 대해서도 불편해하는 기색이다. 국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 등 간의 권한쟁의 심판은 헌재의 권한인데 이를 법원이 침범하려 했다는 이유에서다. 헌재의 한 연구관은 “대법원의 긴급조치 위헌 판결에 이어 또다시 이렇게 무리한 판결이 나온 것은 이미 최고사법기관의 위상을 빼앗겼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 법원의 ‘튀는’ 판결에 헌재 소장 “현대판 원님재판” 비판

대법원과 헌재의 신경전은 이뿐이 아니다. 올 상반기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의 국회폭력 무죄판결 등 ‘튀는 판결’ 논란이 일었을 때 이강국 헌재소장이 직접 나서 “법관이 특별한 이념적·정치적 성향에 따라 재판한다면 현대판 원님 재판이 나설 것이다”라며 견제구를 던졌다. 보수적인 헌재의 성향을 감안할 때 이례적인 일이었다.

두 사법기관의 이런 신경전은 내년 상반기에 본격화될 가능성이 있는 개헌 논의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올 들어 법원 내부에서는 “헌법과 법률 해석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대법원이 헌재를 흡수하는 방식의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얘기가 많이 흘러나왔다. 반면 헌재는 “헌법재판기관이 일반재판기관과 달리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며, 1987년 민주화운동의 결실인 헌재야말로 최고사법기관으로서의 위상을 확실히 굳혔다”고 맞서고 있다.

전성철 기자 dawn@donga.com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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