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스터디/영화, 생각의 보물창고]아저씨·악마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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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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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를 부르는 복수!
조심하라, 자칫하면 당신이 괴물로 바뀔 수 있다


《복수(復讐). 사전적으론 ‘원수를 갚음’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원수(怨讐)란 뭘까요? ‘원한이 맺힐 정도로 자기에게 해를 끼친사람이나 집단’이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복수란 ‘자기에게 원한이 맺힐 만큼 해를 끼친 상대에게 앙갚음을 하는 행위’입니다.
자, 그럼 우린 어떤 경우에 복수를 할 수 있을까요? 분명 복수의 전제조건은 ‘원한이 맺힐 만큼 나에게 해를 끼쳤을 경우’일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합니다. ‘나에게 원한이 맺힐 만큼 해를 끼쳤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란 말이지요.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아저씨·악마를 보았다 복수는 다분히 ‘주관적’ 행위란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복수의 악순환’… 교훈 주려는 잔혹 영상은 좋은걸까?

생각해 보세요.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옆 사람이 실수로 내 발등을 세게 밟았습니다. 발톱이 빠질 듯한 큰 통증이 느껴집니다. 이때 A라는 사람은 그 통증의 정도를 두고 ‘나에게 원한이 맺힐 만큼 해를 끼친 것’이라고 곱씹으면서 발등을 밟은 사람의 발등을 똑같이 밟음으로써 복수를 행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B라는 사람은 A와 똑같이 발등을 밟혔지만 ‘혼잡한 지하철에서 실수로 발을 밟을 수도 있지’하고 너그럽게 이해하면서 복수를 실천하지 않을 수도 있단 얘깁니다.

어때요. 복수는 지극히 주관적이지요? 얼마만큼 해를 입었을 때 복수를 감행해야 하는지에 관한 기준도 천차만별이에요. 발등을 밟혀 통증을 느끼는 순간 복수를 다짐하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못생겼다” “털이 많다”며 창피를 주거나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을 때 복수를 다짐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반면 밤길을 가다 강도를 당해 한 달 동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해서 번 거금 200만 원을 빼앗기고도 복수를 다짐하기는커녕 ‘아, 얼마나 살기가 어려웠으면 이런 강도짓까지 할까’하며 애처롭게 생각하는 사람도 세상엔 없지 않을 거예요.

복수의 방법도 다분히 주관적입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 외모를 비하하는 발언을 한 상대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너야말로 슈렉 뺨칠 정도로 혐오스럽고 지독하게 못생겼어”하고 쏘아붙이는 게 적절한 복수일까요? 아니면 그의 뺨을 한 대 후려갈겨서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자존심 상하는 경험을 안겨주는 편이 합당한 복수일까요? 한마디로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지요?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누군가에 의해 잃는 치명적인 해를 당한 경우 말이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인강도나 연쇄살인범에게 잃었다면 어떨까요? 이 경우는 ‘당연히’ 범인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이런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짓을 저지른 범죄자라면 법이 심판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호되게 복수를 해줘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우린 또 다른 쉽지 않은 문제와 마주하게 됩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살인범에게 행하는 복수는 과연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합당한가 하는 문제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간 자이니 당연히 그 자의 목숨도 빼앗아야 한다고요? 뼈저린 고통을 안겨준 살인범이니 한번에 처단할 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면서 서서히 숨지도록 해야 한다고요? 아, 너무 끔찍한 생각이네요.

생각해 보세요. 그런 잔혹한 복수를 한다면 당초 우리가 증오했던 살인범과 우리가 다를 바가 뭐가 있겠느냔 말이에요. 원인을 제공한 쪽은 살인범이므로 살인범을 살인하는 것은 지탄받지 않아도 될 행위일까요?

여기서 퍼뜩 떠오르는 미국 드라마가 있어요. 바로 ‘덱스터(Dexter)’라는 드라마이지요. 이 드라마는 ‘연쇄살인범들만을 골라서 죽이는 한 연쇄살인범의 이야기’입니다. 덱스터란 남자는 살의(殺意)를 주체하지 못하는 저주받은 인간인데요. 연쇄살인범들만 쫓아다니면서 살해함으로써 ‘난 살인을 저지르지만 사회적 쓰레기들만을 처단하므로 일견 정당화될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런 덱스터의 살인행각을 이해해줄 구석이 있다고 판단하나요?

철학자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란 저서에서 이렇게 갈파했어요. ‘괴물을 쫓는 자는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 볼 것이다.’

우린 어떤 경우에 복수해야 하나요? 복수를 하고 안 하고를 결정하는 기준은 뭘까요? 만약 복수를 한다면 어떤 선에서 하는 것이 합당할까요?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게 적절한 복수인가요, 아니면 원인제공자는 상대방이므로 받은 것의 백배 천배를 갚아주는 것이 합당한 복수인가요? 만약 백배 천배를 갚아주기로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백배 천배를 갚아주는 셈이 되는 걸까요?

복수의 기준과 정도는 이렇듯 상황마다 사람마다 달라요. 게다가 ‘복수를 하겠다’는 분한 마음에 복수를 실행하다 보면 당초 자신이 당했던 해악보다 백배 천배로 잔혹한 복수를 실행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요. 이를 두고 ‘복수의 딜레마’라고도 해요. 니체가 말했듯 ‘괴물을 쫓다가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꼴’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우리 사회는 사적(私的)인 복수를 금하고 대신 법이라는 장치를 통해 죄인들을 심판함으로써 사회적 합의를 통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단죄(斷罪)하려고 하지요.


요즘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 같은 핏빛 복수를 다룬 영화들(이들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입니다)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남자가 악인에게 끔찍한 복수를 한다는 내용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이들 영화는 지나치게 잔혹한 복수의 순간들을 촘촘히 나열하지요. ‘악마를 보았다’를 만든 김지운 감독은 “주인공이 복수를 감행해가는 과정에서 (원인을 제공한) 살인마 이상으로 끔찍하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면서 “이를 통해 복수란 정당화될 수 없으며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뿐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려했다”고 말했어요.

정말 궁금해집니다. ‘복수는 나쁘다’는 교훈을 주려했다는 ‘목표’가 있었으므로 피 칠갑의 끔찍한 복수 과정을 커다란 스크린에 낱낱이 보여주는 ‘과정’ 자체가 정당화될 수 있는 걸까요? 잔인무도한 폭력묘사를 ‘예술적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영역으로 보아야 하는 걸까요? 어떤 복수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복수를 보여준다? 유치한 말장난 같기도 하고 심오한 철학처럼 들리기도 하네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논리적인 글이나 말로 한번 표현해 보세요.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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