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존을 향해/2부]<8>‘전리품’ 악순환에 길 잃은 국민의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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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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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공영’ 없는 공영방송
정권 바뀌면 사람 바뀌고 논조 바뀌고…

《“여의도 방송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혁명을 겪습니다. 사장이 바뀌고 또 ‘잘나가는’ 간부들의 면면이 달라지고…. 보도나 프로그램 논조도 다 바뀝니다.” 근무경력 20년이 넘는 한 방송사 간부의 말이다. 새삼스러운 비밀도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의 방송은 정권의 전리품처럼 취급됐다. 권위주의 정부 때는 ‘정권의 나팔수’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송사 인사 논란이 일었고 보도와 논평도 바뀌었다.》

○ 정권 교체기마다 인사 논란

노무현 정부는 대선 당시 언론고문을 맡았던 서동구 씨를 KBS 사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서 씨는 당시 지명관 KBS 이사장이 “(청와대 측의)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하면서 임명 9일 만에 물러났다. 정연주 씨가 사장 후보로 거론됐을 때도 청와대 측이 “정 씨를 민다”는 의사를 지 이사장에게 전달하는 등 인선에 개입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2009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의 방송팀장으로 활동한 김인규 씨를 KBS 사장에 임명했다. 올 3월에는 김우룡 당시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월간 ‘신동아’ 인터뷰에서 청와대가 MBC 인사에 개입했음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왜 매번 정권은 방송사 사장에 ‘자기 쪽 사람’을 앉히려고 집착하는 것일까. 지상파 방송은 속성상 짧은 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대중의 ‘감정과 정서’를 움직여 여론 형성 과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모든 방송이 주도했던 월드컵 축구 열기, MBC가 만들어낸 ‘광우병 공포’ 등이 대표적 사례다. 이 때문에 권력으로선 방송을 우호세력으로 삼으려는 유혹이 강할 수밖에 없다. 방송가에서는 ‘사장이 바뀌면 방송이 다 바뀐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내부 조직과 프로그램 방향에서 대대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 ‘정권 코드’에 맞춘 방송 논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송 논조도 춤을 췄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KBS ‘인물현대사’ ‘한국사회를 말한다’ 등 프로그램이 ‘코드방송’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정권과 주류 신문의 관계가 불편해지자 ‘미디어 포커스’ ‘미디어 비평’ ‘신강균의 뉴스서비스, 사실은…’ 등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이 홍수를 이루기도 했다.

현 정부 들어서도 KBS, MBC 사장이 교체되면서 공영방송의 친정부 논조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올해 2월 방송된 KBS 인터뷰 프로그램 ‘설 특집 2010 명사 스페셜’에는 여권 인사 4명이 출연했지만 야권은 박지원 민주당 의원만 출연해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방송인들의 ‘블랙리스트’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 정연주 KBS 사장이 취임하면서 인기 프로그램 ‘역사스페셜’을 폐지했고 4년 반 동안 진행했던 유인촌 씨(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가 물러났다. 그때 ‘가요무대’를 진행하던 김동건 아나운서도 물러났다. 현 정부 초기엔 친노 성향으로 알려진 윤도현 김제동 씨가 KBS 프로그램 진행자 자리를 내놓았다. 최근엔 방송인 김미화 씨가 트위터를 통해 ‘출연금지 문건 때문에 KBS 출연이 안 된다고 한다’는 글을 올려 파장을 일으켰다. 이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공영방송에 대한 불신이 쌓이고 있다.

○ “누군가 악습 고리를 끊어야”

한국의 공영방송은 공영방송의 모범으로 일컬어지는 영국 BBC, 일본 NHK와 대비된다. BBC는 ‘적절한 불편부당성(Due Impartiality)’을 방송이 지켜야 할 기본가치로 삼고 있으며, 감독기관인 ‘BBC 트러스트’에서 공정성을 철저하게 심의한다. 2003년에는 BBC와 당시 토니 블레어 정권 간에 이라크전 관련 보도를 둘러싸고 ‘권언(勸言) 대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비록 나중에 BBC의 잘못으로 드러나 사장이 물러났지만 BBC의 독립성이 어느 수준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NHK 사장은 의회 동의를 얻어 총리가 임명하는 12명의 경영위원회에서 9명 이상의 찬성으로 임명된다. 경영위원회는 교육 문화 과학 산업 분야 전문가와 지역 대표들로 구성돼 다양한 시청자의 입장을 반영할 수 있다. NHK는 철저히 정치중립을 지키기 때문에 공정성 시비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

공영방송의 공정성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집권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김사승 숭실대 언론홍보학과 교수는 “시스템 자체의 문제는 지금까지 여러 과정을 통해 개선해 왔지만 무엇보다도 정권 차원에서 방송을 좌지우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먼저 결심을 해야 해결될 문제”라고 말했다.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제도를 어떻게 바꿔도 완전할 수는 없다”며 “결국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성은 사회적 성숙도와 함께 가는 만큼 공영방송에 대한 국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비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군대에서 고참 횡포에 시달리던 신병이 고참이 되면 똑같이 못된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고참이 되었을 때 ‘악습의 고리’를 끊어줘야 문제가 해결된다. 방송의 공정성도 마찬가지다. 정권을 쥔 쪽이 한번 손해 볼 각오로 ‘악습의 고리’를 끊어야 방송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결단의 문제다.

○ 내부의 움직임은, 자성 vs 노영방송

방송계 내부에서도 “정권 교체 때마다 겪게 되는 혼란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 MBC PD는 “공영방송은 특정 이념이나 정파에 매몰되기보다는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의 김우진 홍보국장은 “정치권력에 따라 보도, 제작이 휘청거리면 공영방송의 존재 의의와 목적 자체를 잃어버린다”며 “정권에 관계없이 공영방송으로서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가 공론화 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개혁 움직임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이 같은 내부 의견은 오히려 소수다.

사실은 방송사 노조의 힘이 지나치게 비대해져 지상파가 내부 구성원들의 정치적 견해를 대변하고, 집단 이기주의를 추구하는 사적(私的) 도구로 잘못 쓰이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방송사 사장은 지나가는 과객’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느슨한 방송사 지배구조의 틈을 노조가 비집고 들어오면서 ‘노영(勞營) 방송’의 폐해가 나타난 지 오래다. 권력 개입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내부적 문제가 또 하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할 명제가 있다. 주파수는 전형적인 공공재로 ‘진짜 주인’은 집권세력이나 방송사 구성원이 아니라 전체 국민이라는 점이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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