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존을 향해/2부]<6>‘영어 계급사회’ 맘이 편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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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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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교육①: 잉글리시 디바이드
자녀 영어실력 보면 부모의 재력을 안다?

[사례 1]
서울 강남구에 사는 이모 씨(33·여)의 딸 가영이(5)는 2년째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원어민 선생님에게 직접 영어동요도 배우고 영어 동화책도 함께 읽는다. 이제는 디즈니 만화영화 ‘인어공주’는 자막 없이 시청할 수 있다. 이 씨는 “한 달 유치원비가 120만 원이지만 아이가 원어민 같은 유창한 발음으로 영어대화를 건네는 것을 보면 학원을 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사례 2]
충북 음성군에 사는 사랑이(12·초교 5학년)는 할 수 있는 영어가 ‘Good morning’과 ‘I am Sarang’ 정도다. 학교에서 영어시간이 있기는 하지만 잘 이해하지도 못해 영어에 관심조차 없다. 함께 사는 할아버지 김모 씨(64)는 “영어 학원 보낼 형편도 못 되고, 설령 보낼 수 있다 해도 차를 타고 30분은 가야 하는 곳에 있어 꿈도 못 꾼다”고 우울하게 말했다.


《한국 사회에 영어열풍이 거세다. 요즘 어린 자녀를 둔 젊은 어머니들의 가장 큰 고민은 ‘영어 잘하는 자녀 만들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원끼리 자녀들의 영어 공부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몇몇 유명한 웹사이트는 회원이 수십만 명에 이를 정도다.

국제화 시대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을 나쁘게 볼 수는 없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영어 실력은 사교육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점이다. 앞의 두 사례가 보여주고 있듯이 부모의 빈부격차가 자녀의 영어 실력 격차를 낳고, 영어 실력 격차가 사회적 지위 격차로 이어지는 ‘잉글리시 디바이드(English Divide·영어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사회가 ‘영어 잘하는 계층’과 ‘영어를 못하는 계층’으로 나뉘는 새로운 계급사회가 형성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영어교육에 쓰는 돈도 어마어마하다.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2009년 한 해 초중고교생이 쓴 사교육비는 총 21조6000억 원. 이 중 영어 과목 비중이 33.1%로 압도적이다. 초등학생 1명의 월평균 사교육비는 영어가 8만4000원으로 수학(4만4000원), 국어(2만 원)보다 훨씬 많다. 영어 사교육 시장은 매년 5% 이상 성장하는 ‘불황 무풍지대’이기도 하다. 매년 해외 어학연수와 조기유학 등에 천문학적인 외화가 빠져나가고 있다.》

○ 새로운 계급사회 ‘잉글리시 디바이드’

지난해 실시된 2010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외국어 표준점수(140점 만점)를 서울 25개 구별로 분석한 결과 소득수준이 높은 강남구(110.28)와 서초구(109.90)가 1, 2위를 차지했다. 소득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구로구(91.621)와 금천구(88.75)는 최하 점수를 받았다. 소득격차가 영어실력 격차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잉글리시 디바이드는 사교육 경험에서도 차이가 났다. 교육시민단체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 지난해 수도권 서부 북부와 성남 분당, 서울 강서 강남의 5개 초등학교 학생 23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영어유치원 참여 경험은 강남 지역(25%)이 비강남 지역(1%)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해외연수 참여 경험(강남 40%, 비강남 22%)과 영어전문학원(강남 77%, 비강남 40%) 참여 비율도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최샛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논문 ‘한국사회에서 영어 실력에 대한 문화자본론적 고찰’에서 월소득 500만 원 이상 가정은 취학 전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비율이 12.6%였지만 150만 원 이하는 2.2%에 불과했다. 최 교수는 “부모의 경제적 배경이 자녀가 영어 공부를 시작하는 시기와 학습 방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 부실한 영어 공교육

왜 영어는 사교육 의존도가 높은 것일까. 언어교육은 원어민 교사와의 접촉이 효과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부실한 영어 공교육에도 큰 책임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지금도 국내 중고교 교실에선 영어시간에 ‘주격 보어, to부정사의 부사적 목적용법, 직접화법의 간접화법 전환’ 등 19세기 식 낡은 ‘일본판 영어문법’을 가르치고, 시험에도 출제한다. 이처럼 문법 중심의 오랜 영어 공교육 관행은 한국인의 영어 실력 향상의 발목을 잡고 있고, 사교육 의존도를 높인다.

“학교에서 10년간 영어를 배워도 말 한마디 못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의 한 중학교 영어교사는 “학교 현장에는 아직도 영어를 문법으로만 생각하는 교사가 일부 있다”며 “문법은 회화에 비해 가르치기 쉬운 데다 몸에 밴 오랜 습관 때문에 바꾸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홍인기 좋은교사운동본부 정책위원장은 “학교에서 실용적인 영어를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고 못하는 아이도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 모두가 원어민처럼 발음해야 하나?

한국 사회에서 지나친 영어 열풍은 ‘영어점수’와 ‘영어실력’이 직장과 학교에서 개인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대학이 공인 영어 성적을 졸업 자격으로 두고 있고 웬만한 대기업은 입사 때 토익 900점 이상을 요구한다.

실제로 올해 4월 온라인 취업사이트 사람인이 인사담당자 37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4.6%가 “영어 실력이 좋은 사원이 연봉을 더 많이 받는다”고 대답했다.

국내 한 대기업은 e메일 시스템부터 사내 인트라넷을 모두 영어로 구성했다. 앞으로는 모든 문서와 회의까지 영어를 사용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다른 대기업은 얼마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영어 프레젠테이션대회’를 개최하는 등 직장에서의 영어 열풍은 거세지고 있다.

물론 글로벌시대 영어 실력은 중요한 경쟁력이다. 그렇지만 국민 모두가 영어를 잘할 필요는 없는데 현재 한국인들의 영어에 대한 ‘열정’은 과열양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영어 전문가가 되려 한다면 모르겠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시간이라는 제한된 자원을 각자의 전공에서 전문화하는 데 집중 투입해야 한다는 것.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무조건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인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어민 수준의 영어 능력을 갖추려면 가급적 이른 시기에 이민을 가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언어습득 목표가 원어민이 되는 게 아니라면 영어는 어느 시기에 누구나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TV에는 발음은 외국인 발음이지만 자신의 생각을 자신 있게 영어로 설명하는 외국인 전문가가 자주 등장한다. 외국인 입장에서 잘하는 영어가 꼭 발음을 미국인처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윤석만 기자 sm@donga.com
남윤서 기자 bar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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