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를 다녀왔다. 두바이와 나이로비를 거쳐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까지 꼬박 하루가 걸린다. 1994년 종족 간 분쟁으로 100만 명에 이르는 국민을 잃은 르완다는 세계 50개 최빈국 중 하나로 국민소득이 500달러에 불과하다. 수많은 언덕과 산으로 이루어진 르완다는 남한의 4분의 1 크기에 인구 1000만 명이 모여 산다.
작년 초 르완다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의 선입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시골 기차역 맞이방(대합실) 같은 공항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이민국 직원은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길 가운데 가지런히 심은 화초가 눈에 띄고 종이 하나 없이 깨끗한 길거리가 인상적이었다.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은 누런 봉지를 손에 들거나 보따리를 머리에 이기도 했다. 비록 남루한 간판이지만 모두 반듯하게 붙어 있었다. 가난하다는 사실 외에는 여느 선진국 못지않게 질서가 잡힌 국가였다.
르완다는 8월 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폴 카가메 대통령이 재선되리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그는 지난 7년간 르완다를 완전히 바꾸어놓은 주인공이다. 부패 척결, 안전하고 깨끗한 환경, 전산화, 친시장 정책을 통해 가난을 극복하고 아프리카의 허브가 되겠다는 것이 카가메 대통령의 야심 찬 꿈이다.
르완다에서는 비닐봉지를 전혀 쓰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오전이면 모든 차의 운행을 중단하고 전 국민이 청소를 한다. 아프리카판 새마을운동이다. 며칠 전 사업지를 방문할 때 길가에 주민들이 2∼3km 늘어서서 케이블을 묻는 모습이 보였다. 알고 보니 한국기업이 전국에 광케이블을 까는 작업이었다.
르완다의 또 다른 감동은 르완다 사람이다. 이곳에서 만난 공무원은 적극적이고 협조적이다. 공무원이 권위적이지 않다. 나무 그늘에 모여 마을 문제를 의논하는 주민의 모습은 1960, 70년대 우리나라 농촌을 보는 것 같다. 마을마다 학교가 가장 번듯한 건물이다. 대학살 이후 난민 지원과 화해를 위해 활동했던 국회의원은 국제기구에 학교를 우선적으로 지어주도록 요청했다고 한다. 가난한 나라살림에도 불구하고 9년의 의무교육기간을 관철한 일은 교육에 대한 지도자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르완다의 실정에 정작 감동을 받은 건 한국의 아버지들이었다. 국가전력기업, 제약기업, 은행, 임업연구원에서 정년을 마친 60대 한국 아버지들이 르완다 곳곳에 한국국제협력단의 시니어 봉사단원으로 일했다. 농축산대 교수로, 기술대학 교수로 르완다에서 후진 양성에 애쓰는 모습이었다. 가난의 시련을 극복하고 경제발전을 경험한 이들은 뭔가 나눠주겠다는 의욕에 부풀어 이 땅을 찾았다.
미지의 땅 아프리카였는데 막상 와보니 한국의 농촌을 빼닮은 모습이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고향처럼 따스하게 맞아주는 르완다 국민, 최고지도자부터 시골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일으켜보겠다는 신념에 찬 모습, 아프리카의 한국을 만들고 싶다는 이들을 보면서 한국 아버지들은 인생의 황혼을 불태우고 있다.
르완다를 떠나면서 나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보았다. 좌절이 아니라 보람을 느꼈다.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지도자와 국민, 피땀으로 이룬 한국의 발전 경험을 나누려는 한국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새 날을 꿈꾸는 르완다의 항해는 계속되고 있다. 좀 더 많은 한국인이 관심을 갖고 동참했으면 좋겠다. ‘한강의 기적’이 르완다에서도 가능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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