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진실 밝히기 위해 재수사 협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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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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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전 ‘이태원 살인사건’ 무죄 석방 에드워드 리 언론 첫 인터뷰

패터슨 살인장면 직접 목격… 잡히면 사형당할까 두려워
미성년자인 나를 범인 몰아… 만나면 “그러지 말라” 말할것

무죄 풀려나자 학생들 시위… 한국 너무싫어 미국 건너가
영화는 두려워서 보지않아… 유족 억울함 풀어드릴 것


“저, 에드워드 리인데요. ‘이태원 살인사건’ 기사를 쓴 기자와 통화할 수 있을까요?”

1997년 4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햄버거 가게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의 한 장면. 극중에서 살인범으로 몰렸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재미교포 역을 맡은 영화배우 신승환(왼쪽)이 면회 온 아버지에게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1997년 4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햄버거 가게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의 한 장면. 극중에서 살인범으로 몰렸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재미교포 역을 맡은 영화배우 신승환(왼쪽)이 면회 온 아버지에게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15일 오전 동아일보 사회부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15일자 A12면에 실린 ‘재수사 박차 이태원살인’ 기사를 읽고 사건 당사자인 리 씨(30)가 전화를 걸어온 것. 리 씨는 1997년 4월 3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버거킹 햄버거 가게에서 H대 학생 조중필 씨(당시 23세)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가 2년에 걸친 재판 끝에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기자는 곧바로 그와 통화했고 오후 6시 반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음식점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언론 인터뷰를 한 것은 처음이다.

○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

미군 부대 학교를 같이 다니며 알게 된 사이인 리 씨와 아서 패터슨 씨(31)는 사건 당시 서로에게 살인 혐의를 떠넘겼다. 검찰은 고심 끝에 리 씨를 살인 혐의로, 패터슨 씨를 증거인멸 및 흉기소지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1999년 9월 3일 대법원은 리 씨에게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고, 복역 중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패터슨 씨는 리 씨가 무죄 확정판결을 받기 열흘 전인 8월 24일 미국으로 떠났다. 최근 법무부는 패터슨 씨가 유력한 살인용의자라는 검찰의 의견에 따라 올해 안에 미국 정부에 범죄인 인도청구를 할 방침이다.

리 씨는 “검찰이 패터슨을 미국 정부로부터 넘겨받아 재수사하면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무죄를 주장하는 나에게 살인 혐의를 씌워 기소한 검찰에 대한 불신은 여전히 크다”면서도 “재수사에 협조하는 것이 진실을 밝히고 조 씨 유가족의 억울함을 풀어드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무죄로 풀려난 뒤 유가족들의 슬픔을 어떻게 달래줄까 고민했지만 물질적 보상을 하는 것도 ‘내가 조 씨를 죽였다’고 인정하는 행동이 될까 봐 망설였다”며 “어쨌든 내가 그 자리(사건 현장)에 있었던 만큼 유가족을 만난다면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리 씨는 패터슨 씨에 대해서도 “당시 19세였던 그가 사형을 면하기 위해 미성년자인 나를 살인범으로 몰아간 그 심정을 이해한다”고 밝혔다. 패터슨 씨를 다시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묻자 “나는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았다가 풀려났고, 패터슨은 법망을 피해 도망쳐 두 사람 모두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난’ 셈”이라며 “패터슨이 아직도 갱단과 어울리고 누군가를 해쳤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새로 얻은 인생을 왜 그렇게 허비하느냐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 “난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당시 대학입학을 준비하다 일시 귀국했던 리 씨는 조 씨가 살해될 때 친구 패터슨 씨와 함께 사건 현장인 비좁은 화장실에 있었다. 두 사람만이 그날 밤의 진실을 알고 있는 셈. 리 씨의 진술에 따라 그날 밤의 일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친구들과의 모임에 늦게 도착한 리 씨는 잠시 후 배가 고파 패터슨 씨 등과 함께 햄버거를 먹으러 아래층 가게로 내려갔다. 거기서 칼을 꺼내들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패터슨 씨가 “재미있는 걸 보여줄게, 따라와 봐”라고 해서 함께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안에서 술에 취한 조 씨가 두 사람을 흘끗 째려봤다. 그 순간 동작이 재빠른 패터슨 씨가 갑자기 조 씨의 몸을 흉기로 찌르기 시작했고, 리 씨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피가 솟구쳐 리 씨의 옷에 스프레이처럼 뿌려졌다. 가까이 서 있던 패터슨 씨는 옷이 피로 흠뻑 젖었다.

조 씨가 쓰러지자 패터슨 씨는 리 씨의 어깨를 툭 부딪치며 화장실에서 나가 어디론가 사라졌고, 리 씨는 잠시 후 위층으로 올라가 한 친구에게 “패터슨이 사람을 죽였다”고 털어놨다. 그 후 택시를 타고 다른 친구의 집으로 간 리 씨는 그제야 정신이 들면서 먹은 걸 모두 토했다.

반면 패터슨 씨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리가 칼을 꺼내 조 씨의 등 뒤에서 목 부위 등을 6∼9차례 찔렀다”고 상반되게 진술했다. 결국 거짓말탐지기 조사결과와 법의학자의 소견 등에 따라 살인범으로 지목됐던 리 씨는 구치소에서 1년 동안 수갑을 찬 채 생활했다고 밝혔다. “거기서 한국말이 많이 늘었다”며 씁쓸하게 웃던 그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재판을 기다리며 법정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제가 패터슨에게 ‘이제 그만 솔직히 얘기하라’고 했더니 패터슨이 ‘네가 죽였잖아’라고 하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친구의 의리 때문에 참았는데 그때부터 열이 확 받아 패터슨이 범인이라고 강하게 주장했어요. 또 한 번은 항소심 진행 중에 변호사님이 ‘유죄를 인정하고 형량을 줄이자’고 제안하는 거예요. 제가 ‘난 안 죽였는데 왜 혐의를 인정하느냐’고 소리 지르고 욕하고 난리를 쳤죠.”

○ “한국이 싫고 무서웠다”

1998년 9월 30일 서울고법이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리 씨가 석방되자 H대 학생들은 거리 시위를 벌였다. ‘조 씨가 죽었는데 아무도 처벌받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이듬해 수도권의 한 대학을 다니다 한국을 떠났다. 리 씨는 “한국이 너무 싫고 무서웠다. 모든 사람이 나를 죽이려 드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2년간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그는 ‘사업을 도와 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2002년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 2003년에 결혼식을 올렸고 지금은 여섯 살배기 아들이 있다.

리 씨는 “3년 전 아버지가 억울한 사정으로 사업에 실패하고 사기 등의 혐의로 구속되면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내가 갇혀 있을 때 아버지가 내게 쏟은 부정(父情)을 생각하면 이럴 때 아버지를 돕지 못하고 계속 불효를 저지르는 것 같아 죄송스럽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최근 상영된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을 보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이 또다시 살인범으로 그려졌을까 두려워서다. 언론과 영화사의 접촉도 모두 피했다고 한다. 세 시간가량 인터뷰하는 도중 그의 휴대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검찰이 재수사에 나섰다’는 뉴스를 본 지인들의 전화였다. “난 괜찮아. 걱정하지 마.”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최우열 기자 dns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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