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기부문화 리포트]교포 2세 데이비드 김

  • 입력 2009년 9월 28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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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김 씨의 부모인 루크 김 전 교수(왼쪽)와 그레이스 김 씨. 이들은 평생 나눔의 삶을 실천하면서 아들에게 기부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사진 제공 루크 김 전 교수
데이비드 김 씨의 부모인 루크 김 전 교수(왼쪽)와 그레이스 김 씨. 이들은 평생 나눔의 삶을 실천하면서 아들에게 기부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사진 제공 루크 김 전 교수
《한가위가 다가왔지만 우리 주변엔 쓸쓸한 명절을 보내는 이웃이 여전히 많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소중함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더 절실해졌다. 본보 취재팀은 나눔과 베풂의 문화가 뿌리내린 미국과 유럽을 찾아 한국이 ‘따뜻한 기부 선진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지혜를 살펴봤다.》

■ 美교통부 차관보 교포 2세 데이비드 김

“美서 나를 키운 롤모델은 나눔의 삶 솔선한 부모님”
“아버지 40여년 인술 펴며 집 한채 남기고 모두 기부
그 정신 배워 공직에 투신”

올해 6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교통부 차관보에 30대 중반의 한인 교포 2세 데이비드 김(김성철·36·사진) 씨를 발탁해 화제가 됐다. 오바마 선거 캠프에서 참모로 활동했던 그는 고경주 보건부 차관보, 고홍주 국무부 법률 고문 등과 함께 한인 교포 출신으로는 몇 명 안 되는 미 행정부 고위 관료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한국 언론 최초로 동아일보와 가진 e메일 인터뷰에서 “부모님의 평생에 걸친 기부 정신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미국 데이비스캘리포니아대(UC데이비스) 의대 정신과 교수를 지낸 부친 루크 김(김익창·79) 씨와 모친 그레이스 김 씨(78)가 기부와 사회봉사를 통해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책무)’ 정신이 아들의 삶에 깊숙이 스며든 것이다.

이달 초 미국 캘리포니아 주 남부의 아담한 도시 실비치. 자택 인근 식당에서 만난 김 전 교수는 노환으로 몸이 조금 불편해 보였다. 말보다는 필담이 수월했다. 그러나 기부에 대한 생각을 묻자 눈빛이 또렷해졌다. “사람에게 나눔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아들 역시 이 말에 동의했다. “‘말보다는 실천으로 보여주라(Put your money where your mouth is)’는 격언이 부모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마저 들곤 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딱히 훈계를 많이 하신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행동으로 본보기를 보여주셨죠. 평생 기부하고 봉사하던 모습은 제 인생의 영원한 롤(role)모델입니다.”

정신과 의사라면 미국에서도 고액연봉자에 속하는 직업. 하지만 김 전 교수 부부는 은퇴자들이 주로 사는 동네의 작은 집과 월 5000달러의 연금 말고는 별다른 재산이 없다. 두 아들이 성인이 된 이후론 금전적 지원을 일절 하지 않았다. 나머지는 전부 기부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2006년 교수 은퇴와 동시에 30여 년간 살던 집마저 작은 규모로 옮기고 차액 25만 달러를 대학에 내놓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만 있다면 언제나 남을 도울 힘이 있다고요.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또 다른 방식으로 도울 수 있다는 거죠. 바로 그 나눔의 정신이 우리 가족을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고개 들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아시아인은 돈을 많이 벌어도 미국 주류(mainstream)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의 삶은 제 미래를 위한 최고의 투자였습니다. 아버지의 기부가 저를 성공으로 키운 셈입니다.”

데이비드 김 차관보에게 부친이 물려준 ‘찬란한 유산’은 바로 남을 위해 베푸는 마음이었다. 실제 그도 대학생 시절부터 재미동포 권익옹호를 위한 비영리단체인 한미연합회(KAC·Korean American Coalition)를 통해 활발한 지역봉사 활동을 펼치며 부친의 뜻을 실천해 왔다.

어렵게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김 전 교수가 달랑 100달러를 들고 미국 땅을 밟은 것은 1956년. 의대 인턴 과정을 마치고 학자금 융자를 갚는 데만 15년이 걸렸다. 자신을 힘겹게 한 세상에 한이 생길 법도 했지만 그는 세상에 ‘기부’란 미소로 답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자란 아들은 미국 주류사회의 동량(棟梁)이 됐다.

부부가 나눔을 베푼 시기를 보면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1962년 혼인해 결혼 5년차부터 기부를 시작했다. 부부는 인턴 월급 약 100달러로 근근이 생활을 꾸려가던 터였다. 학자금 대출을 갚기도 벅찼지만 한국 입양아를 돕는 단체에 당시 부부에게는 거금인 1000달러를 내놓았다.

“정신과 상담을 하며 한 입양아 환자를 만났는데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타향에서 우연히 만났지만 같은 동포 아닙니까. 그들이 고통 받는 걸 알면서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죠. 무료 상담을 하면서 조금씩 기부금도 보탰습니다. 돈은 조금 덜 쓰면 돼요. 약간의 불편만 감수하면 도울 수 있어요.”

기부 활동은 이후 여러 방면으로 뻗어갔다. 입양아에서 한국 이민자로, 한국인에서 다른 아시아인으로 관심을 확장하며 기부 대상 단체를 늘려갔다. 1980년대 초반에 이미 4만 달러를 기반으로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돈만 아낌없이 내놓은 게 아니었다. 김 전 교수는 평생 무료 정신과 상담을 했고, 아내 역시 고교 교사로 일한 경험을 살려 빈민층 아동 지도에 발 벗고 나섰다.

1973년 미국 한인사회를 뒤흔들었던 ‘이철수 사건’에 관여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철수 사건은 로스앤젤레스의 재미동포 1.5세인 이철수 씨(당시 21세)가 갱 단원을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던 사건. ‘이철수 구명위원회’ 결성을 처음 논의한 곳이 김 전 교수 집의 응접실이었다. 김 차관보에게도 그때의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수많은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 타인을 위해 열정적으로 회의하는 장면은 어린 그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이 개인적 성공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워주곤 했다.

김 차관보는 “부모님의 봉사 정신은 내가 공직에 뛰어든 결정적인 이유”라며 “그들은 언제나 내게 ‘공익활동(public service)은 영예롭고 위대한 부름’이라며 자신감을 심어줬다”고 회상했다.

실비치=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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