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떠나는 대우일렉 직원들 눈물로 쓴 이별의 편지

  • 입력 2009년 6월 10일 02시 51분


“IMF때도 이렇게 춥진 않았는데…
여섯살 아이 뒤척임 소리에 깨어
근심 걱정으로 잠 못 이뤘습니다”
한때 1만명 넘었던 동료 2500명으로 줄어들고
이제 또 1200여 명 떠나
“이 한 몸 그만두는 걸로 회사 살리는데 도움 되길”

“(입사한 지) 어느새 스물 하고도 몇 해가 지난 어느 잔인한 봄날…. 아직도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회사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젠 정말 떠날 때가 되었나봅니다.”

올 3월 중순 대우일렉트로닉스 전 사원에게 전달된 서명훈(가명) 씨의 e메일은 이렇게 시작됐다. 서 씨는 3월 초 대우일렉트로닉스 노사가 사업구조조정 방안에 합의하면서 희망퇴직을 신청한 1200여 명 가운데 한 명. 동료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e메일은 하루 수십 통이 쌓이기도 한다. 한 직원은 “한 통 한 통 답장을 쓰면서 ‘다음에 꼭 함께 일하자’고 다짐을 주고받지만…”이라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서 씨가 남은 동료들에게 가장 간절히 당부한 것은 ‘회사의 회생’이었다. 서 씨는 대우전자 시절 인천공장으로 첫 출근을 한 뒤 20여 년간 ‘대우맨’으로 살아왔다. 회사 월급으로 키워낸 큰아들은 이제 어엿한 군인이 됐다.

“백령도로 발령받고 위로 휴가를 나왔던 큰 녀석을 어제 연안부두에서 보내면서 목이 메는 걸 억지로 참느라 눈이 빨개졌는데, 그래도 그 녀석 의젓하게 ‘필승!’ 하며 포옹을 해주더군요. 힘들고 어려울수록 그만큼 또 성장할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아들에게 해줄 이 말은 마치 평생직장을 떠나는 자신을 향한 독백과도 같았다.

“그냥 툭툭 털고 일어서려다 다시 자리에 앉아 마지막 글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먹먹해진 가슴으로 글 한 줄 남깁니다. 고마웠습니다.”

대우일렉트로닉스(당시 대우전자)는 1999년 8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1990년대 중반 1만2000명이었던 직원 수는 이달 말 사업구조조정을 끝내면 1250여 명만 남게 된다. 워크아웃 10년간 회사를 살려보겠다고 몸부림쳐온 직원들은 남건 떠나건 서로를 위로하며 다시 뭉칠 미래를 기약하고 있다.

박승진(가명) 책임연구원은 동료들에게 e메일을 쓰던 날 아침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장기기증 신청을 했다. 그는 “남아 계시거나 떠나시는 모든 분들에게 드리는 저의 작은 사랑”이라고 전했다. 그에게도 10년 넘게 정든 일터를 떠나는 것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여섯 살 난 아이의 뒤척임 소리에 깬 뒤 가시지 않는 근심과 걱정, 그리고 대우에서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날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10년 전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떠나는 사람도 남은 사람도 ‘눈물의 위로’

“1998년 유난히 추웠던 그 겨울도 이렇게 춥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그때는 우리 모두가 하나였는데…. 서울역과 종묘 그리고 매서운 눈보라 속의 광주. 지리산을 넘어 서울까지의 사이클링 투어. 대우를 사랑하는 마음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넘은 오늘 사랑하는 대우를 떠날 준비를 합니다.”

박정훈(가명) 책임연구원은 장문의 e메일에서 남은 동료들을 오히려 격려했다.

“15년 3개월여의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여러분과 동고동락하며 지나온 시간들을 생각하며 여러분 곁을 떠나려 하니 만감이 교차하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어렵습니다. 저는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움 속에 기회도 있습니다.”

‘탱크’ 신드롬을 일으키며 가전명가로 불렸던 대우일렉트로닉스는 워크아웃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매출액도 2004년 2조3000억 원에서 지난해 1조9000억 원으로 줄어들었다. 매각작업도 순탄치 않았다. 채권단은 2005년 매각 결의 후 △2006년 9월 인도 비디오콘-미국 리플우드 컨소시엄 △2008년 2월 미국 모건스탠리 △2008년 10월 리플우드를 각각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지만 모두 무산됐다. 결국 올 들어 비주력사업 정리라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게 됐다.

물론 노사 간 갈등도 있었다. 그동안 매각협상이 무산된 것이 노조 측의 발목잡기 때문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경영정상화라는 같은 목표를 가진 노측은 파업이나 쟁의를 일으키지 않았다.

이번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한 강희찬 홍보법무담당 이사는 “구조조정 대상자들에게 이를 통보하고 희망퇴직을 받는 일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고통”이라며 “직원들이 험한 말 대신 오히려 ‘회사를 꼭 살려 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을 보고 진한 가족애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강 이사도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원 절반을 내보냈다는 점 때문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내린 결정이었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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