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환자를 언제… 인공호흡기 떼야하나

  • 입력 2009년 5월 23일 02시 59분


■ 존엄사 인정 이후… 가이드라인이 급하다

《대법원이 21일 존엄사 허용 판결을 내림에 따라 법제화 논의도 가속화될 조짐이다. 그러나 이번 판결이 ‘존엄사의 방향성’만 제시했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앞으로의 과정이 더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치료불가능 기준-가족 결정 여부 등 논란 소지
여야 법제화 착수… 이견 많아 순탄치 않을 듯

2월 ‘존엄사 법’을 대표발의한 의사 출신의 한나라당 신상진 의원은 22일 평화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대법원의 판결로 존엄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논의할 수 있는 물꼬를 텄다”며 “앞으로 존엄사가 제도화돼야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국회 보건복지가족위원회에 계류돼 있는 신 의원의 법안은 ‘2명 이상의 의사가 말기 상태라고 진단한 환자로, 회복 가능성이 없고 치료 불가능한 경우’에 존엄사를 허용토록 한정했다. 또 별도로 의료윤리심의위원회를 만들어 환자의 치료 가능 여부를 판단하도록 했다. 환자가 ‘사전의료지시서’에 서명하면 존엄사 절차를 밟을 수 있으며 중간에 철회할 수 있도록 했다.

같은 당 김세연 의원은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권리에 관한 법(자연사법)’을 이달 말까지 발의할 예정이다. 존엄사라는 용어는 안락사를 미화하는 표현이란 이유로 뺐다. 김 의원의 법안은 환자의 직접적인 의사 표시가 있을 때만 존엄사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했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과는 달리 가족이나 대리인을 통해 환자의 의사를 추정할 여지를 남기지 않은 것이다. 또 환자가 뇌사 상태에 있더라도 호흡, 순환, 소화 기능을 유지하고 있으면 존엄사를 진행할 수 없도록 했다.

민주당 전현희 의원도 조만간 관련법을 발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보건복지가족위 한나라당 안홍준 간사는 “6월 국회에서 여야 간사 합의를 통해 존엄사 법안을 상정해 논의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법제화 논의가 일고 있지만 일선 병원에서는 적잖은 혼란이 예상된다. 의료현장에서는 개별 환자별로 상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대법원이 존엄사의 조건으로 제시한 ‘회복 불가능한 사망단계’인지를 결정하기 쉽지 않다. 연명치료의 범위를 심폐소생술로 할지, 인공호흡기 이용까지 포함할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실제 의료현장을 들여다보면 그런 논란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주장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병원 관계자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환자를 ‘아주 작은’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소홀히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사망하도록 하는 관행이 이미 존재한다”며 “이 방법이 환자가 어떤 단계인지를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다”고 말했다.

의료계는 주무부처인 보건복지가족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등 대형종합병원 관계자들은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상황이 아니다”며 “법적 문제는 복지부에서 해결해 줘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윤성 대한의학회 부회장은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더라도 다양하고 개별적인 사항을 일일이 법으로 규정할 수 없을 테니 자세한 지침은 의학회나 의사학회에서 만들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며 “조만간 회의를 소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곽숙영 복지부 생명윤리안전과장은 “의료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자세한 사항까지 규정을 만들어야 하니 전문가가 만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면서도 “병원별로 지침을 만들거나 전문가 단체에서 만든 가이드라인이 있으면 우리가 받아보고 조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 안에서도 존엄사 허용의 기준이나 연명치료의 기준, 존엄사 절차를 놓고 이견이 많아 법제화 작업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22일 당5역회의에서 “법원 판결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판단이지만 입법은 (존엄사에 대해) 일반화해서 정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며 “존엄사라는 이름으로 고귀한 생명을 죽이는 입법은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변웅전 보건복지가족위원장은 21일 논평에서 “존엄사 허용이 치료 불가능한 환자에 대한 살인 면허로 오인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보수 성향의 일부 의원은 “존엄사는 법제화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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