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COOK’ 하니 인생 2막이 신바람

  • 입력 2009년 5월 20일 02시 58분


성북구 ‘실버남성 요리교실’ 백발의 어르신들 배움 열기 후끈
“직접 만든 요리 가족들에게 내놓을때 행복”

18일 오후 서울 성북구 장위1동 주민센터의 한 강의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고소한 부침개 냄새가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간장은 두 큰 술만 넣으세요”라는 강사 김자경 씨(42·여)의 높은 목소리와 “네”라고 답하는 수강생들의 낮은 목소리가 대조를 이뤘다. 요리교실이면 보통 여성들이 많지만 이날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60, 70대 남성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성북구가 운영하고 있는 ‘3기 실버남성 요리교실’에는 42명의 수강생이 참여하고 있다. 수강생 안병호 씨(65)는 공무원 생활을 하다 퇴직한 뒤 집에만 머물렀다. 식사 시간이 되면 괜히 부엌을 기웃거렸지만 아내도 직장을 다니기 때문에 제때 끼니를 챙겨 먹기 어려웠다. 안 씨는 “앞으로는 내가 아들과 아내의 뒷바라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요리교실에 등록했다”며 “이제는 김치찌개는 기본이고 황태포무침도 맛있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요리교실 최고령자인 성수형 씨(83)도 “다른 수강생들과 이야기도 하고 요리도 같이 만들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며 “요리교실을 다니는 걸 아이들이 알면 집사람이 밥도 안 해준다고 생각할까 봐 자식들에게는 비밀로 했다”고 웃었다.

실버남성 요리교실에서는 별미를 만드는 법 대신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노인들이 직접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 법을 주로 가르친다. 여기에 오래된 쌀로 밥을 만들 때는 소금을 넣어 밥맛을 좋게 한다거나 멸치를 건새우와 함께 볶아야 국물 맛이 좋아진다는 요리 노하우도 알려준다.

신성용 씨(67)는 “다른 요리에 응용할 수 있는 비법을 배울 때가 정말 재미있다”며 “아내도 미처 몰랐던 요리법을 내가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요리교실에서 배운 요리를 손수 만들어 가족들에게 내놓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이정득 씨(63)는 “수업 전에는 내가 만들면 라면조차 안 먹던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준 된장찌개를 싹싹 긁어 먹을 때 제일 행복하다”며 웃었다. 강사 김 씨는 “처음에는 부끄럽고 수줍어 뒷짐만 지던 어르신들이 한 달만 지나면 적극적으로 바뀐다”며 “몇몇 학생들은 밤에도 전화를 걸어 ‘전에 배운 걸 연습하고 있는데 잘 안 된다’며 다시 가르쳐 달라고 조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성북구는 지난해 10월 1기 수업을 시작하며 과연 ‘실버남성’들이 요리를 배우러 올지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총 55명의 수료자를 배출한 1, 2기 수업에 신청자가 폭주하자 3기부터는 수강생을 40명으로 늘렸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석 달 동안 진행되는 수업이지만 수업료가 8만 원에 불과한 것도 인기의 한 요인이다. 서찬교 성북구청장은 “복지시설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르신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4기 과정부터는 두 개 반으로 늘려 운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실습이 끝나고 시식을 하는 시간. 이날 과제인 김치찌개와 부침개를 식탁마다 차려놓고 수강생들은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수강생들은 “직접 만든 요리를 다른 수강생들과 함께 나눠 먹으며 가끔 반주를 즐기는 재미도 있다”며 웃었다. “다음 주에 또 봅시다”라는 인사를 건네며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수강생들의 손에는 가족에게 갖다 줄 부침개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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