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황금가지

  • 입력 2009년 2월 2일 02시 58분


이성-첨단의 시대, 우리는 왜 주술을 믿을까

저 멀리 우주선이 날아다니고 클릭 한 번에 전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오래된 것들의 흔적이 많다.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으레 토정비결을 본다. 기우제를 지내면서 개의 피를 뿌리기도 한다.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는 풍습이지만 비합리적인 주술과 신화적 사고 안에서 인간 정신의 원형을 발견한 신화학자가 있다. 바로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다. 그는 ‘황금가지’에서 오늘날의 인간 정신이 원시시대와 본질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 책은 한 남자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이탈리아 로마 근교의 네미 호숫가 옆에는 디아나 여신을 모시는 신전과 작은 숲이 있다고 한다. 이 숲 속에 황금색 가지를 지닌 나무가 있는데, 한 남자는 칼을 빼어 들고 밤낮으로 이 나무를 지킨다. 그는 신전의 사제이자 숲의 왕이며 동시에 살인자이기도 하다.

사제가 되려는 자는 기존의 사제를 죽여야만 사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왕이 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성스러운 황금가지를 꺾고 약한 왕과 결투를 벌여 그를 살해하면 된다. 이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비극의 반복이 바로 이 성소의 규칙이다.

도대체 숲의 왕은 왜 전임자를 살해해야 할까. 그리고 그는 왜 전임자를 살해하기에 앞서 황금색 나뭇가지를 꺾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왕의 죽음은 농경 제의를 드러내는 신화적 스토리다. 숲과 호수는 생식과 풍요를 상징한다. 디아나 여신은 야생동물과 대지 농업 해산의 여신이다. 이를 지키는 왕은 초자연적 존재로 인식됐고 그의 운명은 부족의 운명과 동일시됐다. 따라서 풍요를 지키기 위해 왕은 언제나 건강하고 정력적이어야 하며 노쇠한 왕은 물러나야 했다.

신의 죽음은 농경 제의와 결합돼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식물의 생명 과정은 매년 죽었다가 부활하는 신으로 인격화됐다.

서아시아의 탐무즈와 아도니스, 로마의 아티스, 이집트의 오시리스,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화는 모두 유사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심청이가 인당수에 뛰어들어야 했던 사연이나 이무기에게 마을 처녀를 바쳐야 했던 옛 이야기에서 비슷한 사고를 발견할 수 있다. 풍요가 시작되는 시기에 맞춰 신을 맞이하는 종교 의식의 제물로 여인을 바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금가지는 무엇일까. 우리가 ‘겨우살이’라 부르는 황금가지는 떡갈나무에 붙어사는 기생목을 말한다. 겨울에도 황금색을 띤 노란 꽃을 피우기 때문에 원시인들은 이를 태양빛으로 여겼을 것이다.

황금가지는 하늘의 권위를 상징한다. 프레이저가 이 조그만 숲의 전설에 주목했던 이유는 그 전설의 사실성을 추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술과 종교의 근원적 속성을 파헤치기 위해서였다.

이 책에 나오는 주술의 원리는 현대인의 비합리적 사고를 해석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모방 주술이나 감염 주술은 입시를 치르는 학생에게 엿을 준다거나 이빨을 뽑아 지붕 위로 날리면서 쥐에게 물어가라고 하는 행위의 의미를 알려 준다. 또한 터부, 날씨주술, 희생제의, 육식제의, 유럽의 불 축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대의 주술적 제의와 형식들의 의미를 가르쳐준다.

신화는 우리의 원초적 정신과 문화를 구성하는 모유와도 같다. 물질적 편리함 속에서도 영혼의 빈곤에 괴로워하는 현대인에게 신화는 근원적 향수병을 치유해주는 영양분이다. 기나긴 겨울방학 문명의 근원을 체험해보자. 도도한 인류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포근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철학 논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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