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뇌물? 출처는?… 의문투성이 ‘학동마을’

  • 입력 2009년 1월 13일 02시 55분


■ 전 - 현직 국세청장 高價그림 ‘수상한 흐름’

뇌물? 선물?

전군표 前청장 부인 “韓청장 부부가 인사청탁하며 줬다”

韓청장 2006년 기준 재산공개땐 그림소유 신고 없어

그림 출처?

韓청장 2004년 국장시절 K갤러리 탈세-외환거래 조사

미술계 “K갤러리 추정” K갤러리 “우리와 아무 상관없어”

2000만∼3000만 원에 달하는 고가의 그림이 전·현직 국세청장 사이에 오갔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특히 그림의 입수 및 전달 과정이 모두 석연치 않아 비리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 뇌물인가, 선물인가

전군표 전 국세청장의 부인 이모(50) 씨는 고 최욱경 화백의 추상화 ‘학동마을’의 출처에 대해 한상률 현 국세청장의 부인을 지목했다.

2007년 초 한 청장(당시 국세청 차장)의 부인 김모 씨가 당시 전 국세청장의 집에 직접 찾아와 그림을 놓고 갔다는 것.

이 씨는 12일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1급 공무원 인사 시기였던 2007년 1∼3월경 한 청장의 부인이 집으로 그림을 하나 들고 와 ‘좋은 그림이니 잘 간직하시라’고 말하고 놓고 갔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나는 그림의 ‘그’자도 모르는 사람이어서 당시에는 그 그림이 고가인 줄도 몰랐고, 이사 가거나 할 때 선물하는 정도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며 “그림을 수집하는 취미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작은방에 놔뒀다”고 말했다.

그러나 12일 한 경제신문은 “이 씨가 ‘한 청장 내외와 모처에서 넷이서 만나 인사 청탁과 함께 그림을 건네받았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이 씨는 “그림을 주던 날 한 청장 부부가 지방국세청장이었던 K 씨에 대한 일종의 ‘사퇴 압박 시나리오’를 만들어 갖고 왔다”며 “K 씨 부인이 종교재단에 큰돈을 기부하는데, 공직자 신분으로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기부할 수 있는지 캐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이 씨는 “전 전 청장이 ‘종교적 신념에 따라 십일조를 하고 그러는 이들이 꽤 많은데 그런 것으로 사람을 자를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런 방법은 좋지 않은 것 같다’고 입장을 정리했다”는 것.

한 청장과 행정고시 21회 동기인 K 씨는 당시 차기 청장 자리를 두고 한 청장과 경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K 씨는 2007년 4월 사표를 냈고, 국세청 내부 통신망에 띄운 고별사를 통해 “성과와 보상이 일치하는 인사문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되면 누가 헌신하겠느냐”며 국세청의 인사 관행을 비판했다.

2007년 초 그림을 건네 인사 청탁을 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일본 교토에서 만난 한 청장은 “최근 나와 관련해 10여 가지 언론보도가 있는데 지금까지 모두 다 사실무근”이라며 “모두 내 부덕의 소치”라고 말했다.

○ 그림이 흘러간 과정도 의혹

문제의 그림을 둘러싼 의혹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이 씨가 지난해 10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그림을 서울 종로구의 G갤러리에 판매를 의뢰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다.

판매를 의뢰한 사람과 의뢰받은 사람이 말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그림 주인과 출처가 미술계 인사들의 입을 타고 알려지기 시작한 것. 이는 그림의 주인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미술계의 오랜 관행인 점으로 미뤄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와 관련해 미술계에서는 “G갤러리는 평소 이 씨와의 친분으로 판매를 위탁받았을 뿐, 그림의 출처는 회고전이 열렸던 서울 종로구의 K갤러리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K갤러리는 2005년 문제의 그림 ‘학동마을’의 작가 최욱경 화백의 20주기를 맞아 회고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한 미술학자는 “작가가 활동할 때부터 ‘주 거래처’였던 화랑이 작가가 사망한 뒤에 회고전을 개최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회고전을 하면서 판매도 같이 하는데, 유족들이 팔리지 않은 작품을 화랑에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K갤러리 이모 대표는 “전군표, 한상률 두 사람의 문제일 뿐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며 “오래된 일이라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전시가 끝나고 (그림은) 다 돌려줬고, 누가 줬는지는 검찰에서 조사하면 다 나올 것”이라고 반박했다.

K갤러리는 2004년 8월부터 4개월에 걸쳐 탈세와 외환관리법 위반 등으로 서울지방국세청의 특별 세무조사를 받았다. 이 세무조사로 K갤러리는 약 7억 원의 세금을 추징당했지만, 외환관리법 위반과 관련된 법적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국세청 내부에서는 “외환관리법 부분은 제대로 된 세무조사가 되지 않은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조사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이 담당했으며, 조사4국장은 한상률 현 청장이었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한 청장을 만난 적도 없을뿐더러 그런 사람을 만날 만큼 세무조사를 받은 적이 없다”며 “나같이 조그만 사업하는 사람이 국세청장에게 말이나 붙일 수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한편 한 청장은 문제의 그림을 2007년 3월(2006년 12월 말 기준) 재산공개 때 이 그림을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한 청장이 이 그림을 어떻게 소유하게 됐는지, 왜 신고하지 않았는지 등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학동마을 故 최욱경 화백의 추상화… 호가 3000만원 안팎

K 갤러리 외국 고가 미술품 등 해외작품 주로 전시해 명성

G 갤러리 現대표, 全 前청장 부인과 친분… 그림판매 맡아

‘학동마을’은 최욱경(1940∼1985) 화백이 타계하기 1년 전인 1984년 아크릴물감으로 그린 추상화다. 크기는 38×45.5cm(10호).

최 화백은 강렬한 색채와 거침없는 붓질로 내면의 열정을 표현한 한국 현대추상미술의 대표 화가로 꼽힌다.

이 작품이 미술시장에서 거래될 경우 가격은 2000만∼3000만 원 안팎일 것으로 추정된다. 미술계에서는 “미술 경기가 위축되지만 않았어도 호가가 4000만 원에 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최 화백 특유의 독특한 색채와 자유분방한 터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고, 선물하기에 가장 적당한 크기여서 경제 사정만 좋다면 높은 가격에 거래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한 미술 전문가는 “최 화백은 박수근 김환기처럼 대중적인 선호도가 높은 화가는 아니지만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마니아도 적지 않다”며 “일반 대중보다는 전문적으로 그림을 수집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2005년 ‘학동마을’ 등 최 화백의 작품을 전시했던 서울 종로구 K갤러리는 1982년 개관했으며 가나아트센터, 갤러리현대 등과 함께 국내 대표적인 갤러리로 꼽힌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미술관장은 “K갤러리는 해외 작가와 작품을 집중 전시하는 곳”이라며 “이처럼 외국의 고가 미술품을 사들이고 전시회를 개최하는 갤러리는 많지 않다”고 전했다.

국세청이 2004년 K갤러리에 대한 특별세무조사를 벌여 외국 미술품 매입 과정에서 외환관리법을 위반했는지 집중 조사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K갤러리는 지난해 삼성 특검 당시에도 삼성그룹 비자금으로 미술작품을 구입해 줬다는 의혹을 받아 이모 대표가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당시 특검은 삼성생명 주식 배당금 일부가 K갤러리 측으로 입금된 경위 등에 대해 조사했다.

전군표 전 국세청장의 부인 이모 씨가 ‘학동마을’ 매매를 의뢰한 서울 종로구 평창동 G갤러리는 1992년 개관한 곳.

G갤러리 홍모 대표의 남편은 국세청의 현직 간부다. 이 같은 인연으로 이 씨가 홍 대표와 알고 지냈으며 작품 판매까지 의뢰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학동마을’은 현재 G갤러리의 응접실에 걸려 있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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