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입력 2008년 8월 25일 03시 00분


폭거와 억압에 대항하는 ‘민주적 예술’ 사진 그리고 영화

과거에 그림은 아무나 볼 수 없는 귀한 존재였다. 귀족들의 집 복도나 성당 깊숙한 곳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정반대다. 영화는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다. 제작하는 데 워낙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소수를 위한 영화를 찍는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림과 영화의 차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그림의 모델이 되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반면, 자신이 영화에 등장하리라 기대하는 사람들은 많다. 노력만 한다면 화면 한 귀퉁이에 등장하는 ‘엑스트라’로 자신의 얼굴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발터 베냐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기술이 어떻게 예술을 바꾸어 놓았는지를 조목조목 짚어준다. 이 책에서 말하는 ‘기술복제시대 예술’이란 주로 사진과 영화를 말한다.

원래 예술은 제사나 의식에서 출발했다. 예술 작품은 연극의 소품과도 같았다. 그리스 여신상의 아름다움은 신전과 제사의 ‘아우라(분위기)’와 떨어뜨려놓고 볼 수 없다. 그리스의 여신상은 제사를 지내는 데 쓰이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과 영화는 예술작품에서 ‘아우라’를 털어내 버렸다. 주인공이 창문을 넘어 산으로 달아나는 장면을 예로 들어 보자. 촬영은 주인공이 창문턱까지 올라가는 모습과 달아나는 장면이 각각 따로 이루어진다. 창문턱까지는 세트장에서, 달아나는 모습은 야외에서 찍기 때문.

세트장에서 담아야 할 장면들과 야외에서 촬영할 광경들은 같은 장소에 해당하기만 하면 내용의 연속성과 상관없이 한꺼번에 몰아 찍는다. 이러다 보니 창문을 넘어 달아나는 장면을 찍는다 해서 주인공이나 촬영하는 사람이나 조급한 ‘아우라’를 느낄 리 없다. 모든 촬영을 마친 뒤 각각 다른 장소에서 촬영한 화면들을 짜깁기해 긴박한 느낌을 만들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화를 접할 때의 마음은 예술품을 감상할 때와 정반대다. 미술 작품을 볼 때는 온 정신을 모아야 하지만 영화는 넋을 놓고 화면에 빠져들게 만든다. 미술 작품이 ‘정신 집중(concentration)’을 하게 한다면, 영화는 거꾸로 ‘정신분산(distraction)’ 상태에 놓이게 한다.

사진과 영화는 정치 선전에 딱 어울린다. 사진의 의미는 밑에 달린 설명에 휘둘리곤 한다. 감상자들이 사진 찍을 당시의 분위기를 알 까닭이 없다. 그냥 찡그린 얼굴 사진일 뿐인데도 ‘분노하는 시민’이라는 제목을 붙여놓으면 꼭 그런 비장함이 엿보이는 듯하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찡그린 얼굴, 불타는 거리, 군대 행진 장면을 이어서 보여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상관없었던 세 장면이 모이면 전혀 다른 메시지를 만들어 낸다. 사진과 영화가 무서운 이유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은 1930년대에 세상에 나왔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세상을 뒤덮던 시기다. 독일의 유대인이었던 베냐민은 히틀러를 피해 달아나다가 결국 자살한다. 복잡한 상황 탓인지 그가 이 책에서 말하려고 하는 결론은 분명치 않다.

베냐민은 사진과 영화에서 희망을 본 듯하다. 만들고 보는 데 많은 사람이 참여해야 하는 ‘민주적’ 예술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히틀러 같은 독재자들은 전쟁을 아름답게 그린다. 이른바 ‘정치적 삶의 심미화’다. 베냐민은 여기에 ‘예술의 정치화’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영화를 이야기할 때면 꼭 다루어지는 고전이다. ‘기술복제 예술’은 텔레비전, 인터넷 등으로 더욱 늘어났다. 1940년에 죽은 베냐민이 지금의 UCC 동영상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이 책이 던지는 생각거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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