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역사에서 논술의 길 찾기]올림픽

  • 입력 2008년 4월 21일 02시 54분


《중국이 올해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곤경에 처해 있다. 성화 채화식에 3명의 시위자가 난입한 것을 비롯해 성화 봉송로 곳곳에서 티베트에 대한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복병처럼 숨어서 중국 정부에 망신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인류 평화의 축전이자 순수한 스포츠 제전이어야 할 올림픽이 정치적인 선전이나 세력 다툼의 각축장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역대 올림픽의 이면을 살펴보면 올림픽이 추구하는 이상과는 또 다른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배경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상업주의… 정치선전… 테러… 오륜기에 묻은 수많은 얼룩

올림픽은 진정 순수한 스포츠 제전일까

기원전 776년에 시작됐다는 고대 올림픽은 본래 제우스신에게 바치는 제전의 일부였다. 제전의 여흥 행사로 여러 가지 운동 경기가 열렸는데,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부 연안의 올림피아에서 열렸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서 ‘올림픽’이라 부르게 되었다. 올림피아는 그리스가 로마에게 정복당한 393년까지 모두 293회에 걸쳐 빠짐없이 계속되었다.

올림피아 제전이 열리는 동안에는 선수와 참관인의 왕래를 돕기 위해 그리스 폴리스(도시국가)들이 한시나마 전쟁을 중지했다. 이 때문에 올림픽은 평화를 상징하는 행사로 여겨져 왔다. 현대 올림픽과는 달리 고대 올림픽은 관람이나 구경이 아니라 참가 선수들의 군사 훈련을 더 중요시했다.

그리스 세계에서 올림픽은 매우 중요한 행사였지만 여성과 외국인, 노예는 참가할 수 없었다. 폴리스의 부자와 권력자들은 서로 동맹을 맺어 올림픽을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행사로 이용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대로 프랑스의 민족주의자였던 쿠베르탱 남작은 근대 올림픽을 부활시켰다. 쿠베르탱은 1870∼71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이유가 군인들의 체력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영국의 럭비 학교를 방문한 뒤에 영국식 스포츠 교육 체계를 프랑스에 이식하려 했고,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체육을 교육 제도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쿠베르탱의 제안은 국제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올림픽조직위원회가 탄생했다. 제1회 올림픽은 초대 올림픽위원장을 맡은 그리스인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와 그리스 왕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아테네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리스는 국민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올림픽 개최를 강하게 원했다.

이처럼 근대올림픽의 시작은 주창자의 민족주의적 목적과 첫 개최지의 민족주의적 목적이 맞물려 탄생하게 되었다.

올림픽은 이미 제2회 대회부터 상업적 목적 때문에 본래의 취지가 왜곡되는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열린 제2회 대회는 당시 파리에서 열리고 있었던 세계박람회의 일부 행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1904년의 제3회 세인트루이스 대회도 사실상 루이지애나 상업박람회의 행사에 불과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역사상 가장 정치적으로 이용된 올림픽으로 꼽힌다.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 독일의 노골적인 정치선전의 장이었다. 히틀러는 만(卍)자십자상으로 장식된 스타디움에서 개회를 선언했다. 대회장 곳곳의 화장실에는 ‘개와 유대인은 출입 금지’라고 쓰인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복식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캐시어스 클레이(나중에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함)는 미국에 돌아온 뒤 인종차별에 항의해 금메달을 강물에 던져 버리기도 했다.

1968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대회는 팽팽한 정치적 긴장감 속에서 개최되었다. 대회 열흘 전, 멕시코 대학생들은 열악한 교육 환경에도 불구하고 국가 재원을 올림픽 대회에 사용하는 것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고, 250명이 넘는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1972년 뮌헨 대회는 올림픽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대회였다. ‘검은 9월단’이라는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이 선수촌을 습격하여 2명의 이스라엘 선수를 죽이고, 9명의 선수를 납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아프리카 지역의 26개 국가가 뉴질랜드 럭비 팀을 문제 삼아 보이콧하였다.

1980년에 열린 모스크바 올림픽은 사상 최대의 보이콧 올림픽이었다. 60여 개의 서방 국가는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이 주도한 이 보이콧에는 한국도 가담했다. 4년 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는 그 반대로 소련이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에 항의해 대회 참가를 보이콧했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은 미국의 민족주의를 분명히 보여 줬다. 미국은 올림픽 개막식 때 ‘찢어진 성조기’를 들고 나와 ‘9·11테러’ 희생자 위령제를 지냈고, 미국인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행사로 일관했다. 이렇게 볼 때 올림픽은 다양한 원인과 이유로 ‘지구촌 스포츠 제전’이라는 올림픽 정신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더 많았다.

박승렬 LC교육연구소장

▼심화토론▼

올림픽이 정치적인 목적이나 상업주의로 훼손되어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석해 보고, 올림픽이 스포츠 제전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지 토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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