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준 수사기록에 드러난 위조-횡령수법

  • 입력 2007년 11월 20일 03시 00분


코멘트
본인여권 내용 바꿔 ‘가공 인물’ 창조

대표이사 등재뒤 퇴직금 39억 송금

미국으로 도피한 지 약 6년 만에 귀국한 창업투자회사 옵셔널벤처스코리아의 전 대표 김경준 씨는 미국 여권 7장과 미국 네바다 주의 법인설립인가서 19장을 위조한 혐의(사문서 위조 및 위조 사문서 행사) 등으로 19일 구속 수감됐다.

본보가 최근 입수한 2002년 옵셔널벤처스코리아 직원들에 대한 검찰의 수사 기록 등에 따르면 김 씨는 2001년 5∼10월 직원들에게 여권과 각종 문서의 위조를 수시로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옵셔널벤처스코리아는 김 씨가 BBK 투자금으로 인수한 회사인 만큼 이 회사의 주가 조작 사건은 통상 ‘BBK 주가조작 사건’으로 불린다.

▽“가공의 인물 계좌에 퇴직금 39억 원 입금”=2002년 3월 11일 미국으로 도피한 김 씨가 옵셔널벤처스코리아의 이모 과장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퇴임한 미국인 이사 스티브 발렌주엘라(Steve Valenzuela) 씨에게 퇴직금 46억 원을 입금하라.”

금융감독원은 사흘 전인 같은 달 8일 옵셔널벤처스코리아를 통한 투자자의 피해 확산을 막기 위해 이 회사를 폐쇄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 씨는 회사의 법인통장에 보관되어 있던 잔금 46억 원을 모두 해외 송금하라고 지시한 것.

이 과장은 회사 자금을 관리하던 오모 차장에게 김 씨의 뜻을 전달했다. 이어 46억 원 중 39억 원이 발렌주엘라 씨의 미국 계좌로 두세 차례에 걸쳐 송금됐다.

발렌주엘라 씨는 2001년 12월 이 회사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회사의 다른 직원들은 그를 본 적조차 없다고 했으나 이 과장만 검찰에서 “같은 해 봄 사무실에서 한 차례 봤다”고 했다. 이 과장은 2002년 김 씨의 사문서 위조 공범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검찰은 발렌주엘라 씨가 위조 여권 속에만 존재하는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 있다. 또한 검찰은 발렌주엘라 씨의 계좌에 입금된 돈을 김 씨가 개인적으로 가로챘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에 앞서 김 씨는 발렌주엘라 씨에게 퇴직금을 지급하라는 이사회 결의가 이뤄진 것처럼 이사회 회의록도 위조했다.

▽“내가 위조하던 글자체를 사용하라”=2001년 가을 김 씨는 외국인이 국내에 법인을 설립하려면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 국내 법무사에게 문의했다.

여권 사본과 영문 국적증명서, 법인인증서 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김 씨는 회사 업무를 총괄했던 이 과장에게 해당 서류의 위조를 매우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우선 김 씨는 A4 용지에 자신의 미국 여권 사본을 복사한 뒤 다른 사람 사진을 붙이고 성명과 생년월일 등이 붙어 있는 곳을 칼로 오려 냈다. 이 과정에서 글자체가 달라 위조된 흔적이 보이자 김 씨는 “내가 전에 사용하던 글자체”라면서 글자체까지 전달했다.

김 씨는 또 발렌주엘라 등 가공의 미국인 이름 7개와 생년월일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이 과장은 포토샵 등 컴퓨터 작업에 익숙한 여직원 김모 씨에게 김 씨의 지시대로 여권을 위조하도록 했다.

여직원 김 씨는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여권 사진을 오려 낸 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외국인의 얼굴 사진을 갖다 붙였다. 이 과정에서 지워진 여권 용지의 바탕무늬를 복구했다. 통상 위조여권 제작에는 2, 3일이 걸렸는데 김 씨는 위조 여권을 빨리 만들어 내라고 재촉까지 했다고 한다.

김 씨가 직접 위조에 나선 경우도 있었다. ‘Shin Giles’라는 명의의 여권이 바로 그것. 처음에는 외국인의 이름을 모두 제공했으나 나중에는 이름까지 인터넷에서 찾아 쓰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내와 누나도 위조 과정에 관여=법인인증서의 원본은 김 씨의 누나인 에리카 김 씨가 미국에서 동생 김 씨 앞으로 보낸 팩스 원본이 활용됐다.

김 씨는 이 팩스를 이 과장에게 전달하며 회사명과 정관등록일을 어떤 것으로 할지까지 지시했다.

이 과장은 인증서 내용 부분을 칼로 잘라낸 뒤 위조 내용을 붙여 복사했다. 위조한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김 씨는 이 과장에게 “한 사람만 서명하면 누군가 알아볼 수 있다”면서 “직원들에게 돌아가면서 서명을 하게 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직원들은 검찰에서 “에리카 김 법률사무소라는 문구가 있는 원본을 10여 차례 활용한 것 같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김 씨는 영문 국적증명서를 위조할 때는 자신이 위조를 할 때 사용하던 디스켓을 건네기도 했다. 이 파일에서 국적 대상자의 성명과 생년월일, 주소, 서명 등을 덮어 씌워 출력한 뒤 이 양식에 위조명 등을 덧씌우는 수법이 이용됐다.

김 씨는 마지막으로 옵셔널벤처스코리아의 부장이자 아내인 이보라 씨가 보관하고 있던 공증확인 고무인을 위조 서류 위에 찍어 가짜 국적증명서를 만들어 냈다.

▽직원들 “김 씨, 점조직처럼 불법행위 시켜”=김 씨가 직원들을 통해 위조한 각종 문서는 곧바로 외국인 명의의 계좌를 개설하는 데 활용됐다.

김 씨는 외국인 투자등록신청서를 작성한 뒤 이를 증권사에 보냈다. 이어 증권사가 금융감독원장 명의의 투자등록증을 보내오면 국내 증권사에 여러 개의 증권계좌를 개설했다. 그는 이 계좌를 활용해 마치 옵셔널벤처스코리아에 외국인이 투자하는 것처럼 속여 주가를 4배씩이나 급등시켰으며 거기서 얻은 차익을 외국인 계좌로 빼돌렸다.

당시 김 씨와 근무했던 한 직원은 최근 신동아 측과의 인터뷰에서 “2002년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김 씨가 직원들에게 점조직으로 불법적인 업무를 지시했다는 점을 알게 됐다”며 “직원 대부분이 그런 지시를 처리하느라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최우열 기자 dnsp@donga.com


촬영: 전윤경 동아일보 객원기자

▶dongA.com에 동영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