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교과서로 논술 잡기]사회영역

  • 입력 2007년 10월 22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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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의 척화론-실리의 주화론, 어느쪽이 옳은 선택이었을까

<주제 탐구의 의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의 시기는 조선왕조의 변혁기이자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중요한 시기였다. 대내적으로 훈구파로 불리는 구정치세력이 퇴조하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그동안 향촌에서 세력 기반을 다져 오던 사림세력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조선과는 전통적 존화주의 관계인 명의 국력이 쇠약해졌고, 17세기 전반 만주에서 일어난 청에 중국의 지배권을 넘겨주었다. 조선 후기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외교적 대응은 척화론과 주화론이라는 상반된 입장으로 대립되었다. 이 주제에서는 조선 후기 외교정책(척화론과 주화론)의 현재적 의미를 새겨 보고자 한다.

<쟁점탐구 1: 척화론>

성공과 실패는 천운에 달렸으니

모름지기 모든 것은 의로 돌아가야 하느니

아침과 저녁은 바꿀 수 있을망정

윗옷과 아래옷을 거꾸로야 입을쏘냐

권(權)은 어진이도 그르칠 수 있으나

경(經)은 사람들이 어길 수 없으니

이치 밝은 선비에게 말하노니

급한 때라도 저울질은 삼갈진저.[김상헌의 시]

인조반정(1623년)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와 평안도 의주를 거쳐 황해도 평산에 이르렀다(1627년).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철산 용골산성의 정봉수와 의주의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였다. 본래 후금의 궁극적인 목표는 중국 대륙의 장악에 있었고, 조선도 아직 적극적으로 항전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화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 후 후금은 1636년(인조14년) 조선에 사신을 보내 기존의 형제 칭호를 버리고 군신 관계를 맺을 것을 강요하는 국서에서 나라 이름을 청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임을 천명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다’는 명분론으로 청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전론이 팽배하게 되었다. 주전론은 김상헌, 윤집, 오달제, 정온, 이경여 등이 주도하였다. 이미 체질화된 성리학의 기준에서 볼 때 북방 오랑캐인 여진족과 형제의 의리나 군신의 의리를 맺는 일은 가당치 않은 굴욕이자 치욕이었다. 이러한 일전 불사의 주장은 당시 사림사회의 여론이자 국론이었다. 이 주전론은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화친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척화론으로 선회하였다. 결국 대세가 주전론으로 기울자 청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을 했다. 이것이 병자호란(1636년)이다.

글 싣는 순서(사회)
번호주제
1개항(1876) 어떻게 볼 것인가?
2지역개발, 무엇이 문제인가?
3우리 곁의 민주주의
4기업의 사회적 책임 어디까지?
5사회 속의 개인
6의무냐, 목적이냐?
7법은 도덕의 최소한인가?
8붕당의 현대적 의미
9지도, 그대로 믿어도 되는가?
10정치 속의 여성
11성장과 분배, 두 마리 토끼인가?
12개고기가 나쁜 음식인가?
13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
14역사란 무엇인가?
15지형의 변화, 어떻게 볼 것인가?
16국제사회를 바라보는 눈
17자본주의의 변신-시장이냐 정부냐?
18TV 속에 비친 우리 사회
19국가란 무엇인가?
20주전론과 주화론
21가라앉는 섬, 누구의 책임인가?
22정치문화와 한국
23누구를 위한 세계화인가?
24동양적 사고와 서양적 사고

<쟁점탐구 2: 주화론>

고요한 곳에서 뭇 움직임을 볼 수 있어야

진실로 원만한 귀결을 지울 수 있느니

끓는 물도 얼음장도 다 감은 물이요

털옷도 삼베옷도 옷 아닌 것이 없느니

하는 일이 어찌 정도(正道)에서 어긋나리요

그대 만약 이 이치를 깨달아 알게 되면

말함도 다 각기 천기(天機)로세.[최명길의 화답시]

척화론의 대세 속에 현실적으로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줄이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출하여 국가 위기를 수습하기 위하여 하루빨리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주화론도 제시되었다. 주화론의 대표자는 최명길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청으로 국호까지 바꾼 여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중원이므로 조선은 빨리 화의를 성립시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각 확장하기>

(가) 역사적으로 선비가 지향하는 핵심적 가치는 세속적 이익을 억제하고 인간의 성품에 뿌리한 ‘의리’(義)이다. 따라서 선비정신은 곧 의리정신으로 나타난다. 공자가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고 한 언급에서도 의리와 이익의 대립적 분별의식(義利之辨)과 군자와 소인의 대립적 분별의식(君子小人之辨)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전환하는 왕조 교체기의 선비들 사이에는 고려 왕조를 위해 ‘절의’를 지켜야 한다는 정몽주 등과 ‘혁명’의 당위성에 따라 새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정도전(鄭道傳) 등의 상반된 입장이 충돌했다. 절의보다 한층 더 큰 의리인 ‘춘추대의(春秋大義)’는 ‘존화양이(尊華攘夷·중화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칠 것)’를 제기한다. 도학적 의리의 가장 큰 과제는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여 이단을 배척하고, 중화와 오랑캐를 가려서 중화 문화를 수호하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중화 문화의 존중은 사대주의라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춘추대의’는 특히 외민족 침략자를 오랑캐로 규정하고 항거하는 신념으로 나타났다.

(나) 유교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당시 글을 읽은 선비라면 으레 명분론이나 의리론에 젖기 마련이었다. ‘변절(變節)’은 지조나 절개를 버리는 것으로 우리 전통에서는 무조건 나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계절의 변화도 ‘변절’이다. 또 절(節)이란 원래 대나무 마디를 가리켰지만 대나무를 쪼개서 키처럼 엮어놓고 긁어서 리듬을 표현하는 악기의 이름이기도 했다. 거기서 파생돼 노랫가락이란 뜻도 나왔다. 이런 뜻에서라면 ‘변절’은 늘 같은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의 분위기에 맞춰 다른 노래를 부르는 행위가 된다. 이런 ‘변절’이라면 욕하기는커녕 칭송할 일이다. 지탄받아 마땅한 것은 개인적 욕심을 위해 말과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변절만이다. 그런데 변절에 대한 부정적 의식이 너무 깊어서 좀처럼 태도나 의식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환경은 수시로 바뀌는데 어느 순간 굳어진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일단 인식의 바탕에 요철이 생기면 죽을 때까지 그대로 간다. 일관성이란 미명으로 치장되기도 하지만 실은 게으름이나 집착 때문이다. 어떤 일이건 이데올로기나 정치 문제로 환원하려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논제1] 제시문 (가)와 (나)를 참고하여 당시 조선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자신의 주장과 근거를 서술하시오.

[논제2] 오늘날의 세계화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에게는 위기이자 기회가 되고 있다. 쟁점 탐구와 제시문을 참고하여 척화론과 주전론을 현재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시오.

공정범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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