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육정수]로스쿨, 定員보다 콘텐츠다

  • 입력 2007년 7월 8일 19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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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인기 TV 퀴즈 프로그램 진행자인 배너 화이트(여)가 한국의 X전자를 걸어 미 법원에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화이트를 닮은 로봇을 VCR 제품 광고에 등장시킨 것이 그의 개인적 상업적 권리를 포괄하는 ‘퍼블리시티(publicity)권’을 침해했다는 이유였다. 로봇이 프로그램 무대를 배경으로 제품을 소개하는 동안 ‘2012년, 가장 오래된 퀴즈 프로그램’이라는 자막도 내보내 자사 제품이 오랫동안 애용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1심 법원은 X사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2심은 원고와 제품 간의 상관성, 시청자들의 혼동 여부, 원고의 동의 여부 등을 판단해 X사에 패소판결을 내렸다. “퍼블리시티권을 과잉보호하면 창의력의 발전을 막게 된다”는 이유로 반대 의견이 있긴 했으나 소수의견에 그쳤다. X사는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끝내 져 40만3000달러(당시 약 4억8000만 원)를 물어줬다.

1993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그 후 미국 로스쿨 강의에서 많이 인용되는 판례가 됐다. 당시 X사 측이 미국의 퍼블리시티권을 잘 이해하고 로봇의 표현기법에 대해 창작 및 언론자유 개념을 동원했더라면 승소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뒤따랐다.

미국 법을 잘 몰라 소송에 휘말리거나 패소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사례는 우리 로스쿨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 준다. 한국 기업 및 상품의 세계시장 진출이 늘어나면서 현지법에 대한 적응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특히 미국법은 세계법이나 마찬가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 5년 안에 국내 법률시장이 전면 개방된다. 국내 로펌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초대형 미국 로펌과 맞붙게 된다는 의미다.

국내 변호사들이 기득권을 누리던 1조3000억 원대의 국내 법률시장은 그야말로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정글로 바뀔 것이다. 1999년 법률시장을 개방한 독일은 랭킹 10위 내 로펌 중 겨우 2곳만 살아남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변호사들의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는 길밖에 다른 비법(秘法)은 없다. 그 첫발이 미국식 로스쿨 제도의 도입이었는데, 다행히 김영삼 정부 이래 13년간의 논란이 이번에 로스쿨법의 국회 통과로 일단락됐다. 이제 대학들은 몇 개 대학이 로스쿨을 인가받을 것이냐, 총정원 및 학교별 배분은 어떻게 될 것이냐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러나 이는 로스쿨의 본질이 아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이냐, 즉 강의 콘텐츠가 핵심이다.

법과대학과 사법연수원에서 가르쳐 온 기존 강의로는 법률시장 개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육법(六法)의 기본 이론과 법정 실무, 국가 법질서와 행정집행에 중점을 둔 전통적 교육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다. 법정 활동도 무시할 수 없지만 통상 분야와 국제거래 등에 대응할 수 있는 글로벌 법조인을 길러내야 한다.

예방법학을 중시하는 쪽으로 리걸 마인드(legal mind)의 틀을 대전환하는 것도 필요하다. 의료서비스가 질병의 사후 치료보다 사전 예방에 주력하고, 기업의 회계 및 세금업무도 문제가 터지기 전에 평소 합법적 관리에 힘쓰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이런 흐름은 각계에서 변호사 수요를 늘리는 부수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로스쿨이 기존 교육을 답습하고 졸업생만 쏟아낸다면 변호사들의 밥그릇만 작아지게 될 것이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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