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7주년]주력산업 ‘이상징후’…과감한 R&D투자 필요

  • 입력 2007년 3월 31일 03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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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 석유화학 업체 A사는 최근 대규모 설비 투자를 구상했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계획대로 신제품을 생산하면 시장점유율이 높아져 정부의 독과점 규제에 걸린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값싼 중국 상품과의 경쟁 때문에 제품 차별화가 절실한데 이렇게 적기(適期) 투자를 못하면 해외시장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A사처럼 각종 기업규제 때문에 투자를 포기하는 사례는 많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올해 1월 286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86.4%)은 신규 사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절반 이상(53.5%)이 “3년 후의 수익원도 확보하지 못했다”는 비관적인 답변을 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얼마 전 “정신 차리지 않으면 4∼6년 뒤 큰 위기가 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기업들의 활력을 되살리는 동인(動因)이 나오지 않는다면 5년 뒤 한국은 ‘먹을거리’가 고갈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지금 주력산업은 위기

“1980년대 일본은 많은 산업에서 세계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경고였다. 지난 10년간 일본의 성공스토리는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경쟁전략’ 이론으로 유명한 마이클 포터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말이다.

과거 세계적인 신화를 만든 일본 기업들은 1990년대 들어 바이오, 정보기술(IT) 산업 등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해 ‘잃어버린 10년’의 원인이 됐다는 얘기다.

이는 현재 한국에도 그대로 들어맞는 지적이다.

1960년대 섬유, 1970∼1980년대 중화학공업, 1990년대 자동차, 2000년대 휴대전화 및 반도체 산업 등 한국에는 각 시대를 주도한 대표 산업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기존 주력 산업을 발전시키지도,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도 못하고 있다”는 회의론이 번지는 상황이다.

주력 산업들의 이상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부문 매출은 2004년부터 18조∼19조 원대로 제자리걸음이고 영업이익은 8조 원가량에서 지난해 5조300억 원으로 줄었다. 휴대전화도 세계 1위와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한국이 노사분규로 허송세월하는 동안 중국 자동차 업체들은 인수합병(M&A)과 신제품 개발로 한국을 맹추격 중이다.

○ 중국, 일본의 협공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는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지금 한국이 하는 비즈니스는 20년 뒤 중국이 다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이는 현실이 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2010년이 되면 이동통신장비와 디지털 TV, MP3플레이어, 의류 등의 분야가 6개월∼5년씩 중국보다 뒤처질 것으로 전망된다.

‘엔저’를 앞세운 일본의 공세도 무섭다.

LG경제연구원은 ‘일본의 공세, 신흥시장이 흔들린다’는 보고서에서 “마쓰시타는 지난해 미국에서 가격을 50% 할인하는 행사를 벌였고, 소니에릭손도 인도시장을 겨냥해 저가(低價)폰을 내놓기로 했다”며 “일본의 반격은 한국의 아성이었던 베트남 등 신흥 시장에 집중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해외 여건이 악화되면 국내에서 대책을 찾아야 한다. 예컨대 자동차, 철강 등 주력 산업은 세계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수록 치열한 가격경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이는 노사의 협력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 기업은 변신할 수 있어야

산업계는 생명공학, 로봇, 서비스 산업 등을 한국의 차세대 주력 산업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하지만 아직 초보적인 단계여서 5년 후 한국을 지탱하기엔 무리라는 평가.

지난해 산업자원부가 펴낸 ‘2015 산업발전 비전과 전략’에 따르면 한국의 대일 적자 중 휴대전화, PC 등 주요 제품의 부품소재 적자가 65%나 된다. 핵심 부품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가격 경쟁력이나 기술 개발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오문석 LG경제연구원 상무는 “주력 산업의 범용기술을 고(高)부가가치 기술로 고도화해야 성장이 가능하다”며 “기업들이 끊임없이 변신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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