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서 오간 말 아니지만 관행따라 기재”

  • 입력 2007년 1월 24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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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발행 사건’의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5부 조희대 부장판사는 지난해 12월 7일 결심공판 당시 공소장 변경과 관련된 검사와의 문답이 공판조서에 임의로 작성돼 있다는 의혹에 대해 “그 부분은 법정에서 실제 오갔던 말은 아니지만 검사와 변호인이 법정에서 동의한 것을 전제로 관행에 따라 기재했다”고 23일 밝혔다.

조 부장판사는 이날 본보 기자와 만나 “공소장 변경의 구체적 내용과 검사의 신청 및 재판부의 허가 절차는 법정에서 실제로 언급하지 않아도 공판조서에 기록하는 것이 관행”이라고 설명했다.

조 부장판사는 또 “(이를 규정해 놓은) 예규 같은 것은 없지만 재판을 오랫동안 해 온 판사들은 누구든지 그 관행을 잘 알고 있고, 그 관행에 따라 처리한다”고 덧붙였다.

문제의 공판조서에는 재판장인 조 부장판사가 먼저 검사에게 “공소장을 변경하겠느냐”고 묻고, 이에 검사가 동의하면서 새로 추가할 공소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처럼 기록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 부장판사의 이날 설명은 검사와 변호인의 동의가 있었던 만큼 법정에서 실제 오가지 않은 문답 내용이지만 법원의 오랜 재판 관행에 따라 정해진 양식에 의거해 공판조서에 정리해 두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관행’의 구체적인 근거와 범위는 명확하지 않다. 판사들은 이를 관행이라고도 부르고 매뉴얼이라고도 부른다. 정해진 양식이 있다고도 한다.

형사소송법(51조)에는 법정에서 이뤄진 변론의 요지를 공판조서에 적도록 규정하고 있다. 공소사실의 진술과 공소장을 변경하는 서면을 낭독하도록 하는 규정도 있다.

다만, 법정 안에서 재판장이 검사와 변호인의 동의를 구두로 얻어 공소장을 변경하는 경우 이를 어떻게 공판조서에 기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규정이 없다.

형사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법원이 공판중심주의를 제대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절차를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이는 지금까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돼 온 것들을 좀 더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규정해 두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法-檢 수뇌 ‘속앓이’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의 공소장 변경 논란에 대해 법원과 검찰은 겉으로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며 사건의 파문을 가라앉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양측 다 속내는 복잡하다. 국민적 관심이 쏠려 있는 중요 사건 재판에서 절차상의 문제점이 드러났고, 공소장 변경이 이번 재판은 물론 나머지 피고발인 수사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진퇴양난 검찰=이인규 서울중앙지검 3차장은 23일 “공소장 변경을 신청하지 않았는데 동의를 할 수 있겠느냐”며 지난해 12월 7일 항소심 결심 공판에서 검찰이 공소장 변경을 신청하거나 동의하지 않았음을 거듭 확인했다.

그럼에도 검찰은 “기존의 공소사실은 그래도 남아 있기 때문에 공소장 변경이 검찰에 불리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검찰 수뇌부도 대응을 자제하면서 논란이 확산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듯한 분위기다.

그동안 에버랜드 사건 수사와 재판의 초점은 삼성 이건희 회장 일가와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인 허태학 박노빈 씨가 공모해 에버랜드 전환사채(CB)를 싼값에 이 회장의 자녀들에게 넘겼는지에 맞춰져 왔다.

공소장 변경을 통해 추가된 내용은 허 씨와 박 씨가 기존 주주들의 대량 실권이 확정된 이후에는 지배권의 변경이 발생할 수 있는 만큼 기존 주주 등에게 이를 고지하는 등 이사로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의무를 어겼다는 것이다.

그룹 차원의 공모 부분이 여전히 공소사실에 포함돼 있기는 하지만, 재판부가 공소장 변경을 통해 새로 추가한 허 씨와 박 씨의 배임 쪽에 무게가 쏠릴 가능성이 있는 것.

당초 이 사건에서 유죄 판결이 나면 이 회장을 불러 조사한 뒤 기소 여부를 결정하고 수사를 마무리한다는 것이 검찰의 계획이었다.

그럼에도 선고 공판을 앞두고 검찰은 법원에 대해 절차상의 문제를 제기하기가 껄끄러운 상황이다. 재판부가 공소장 변경을 통해 허 씨와 박 씨의 배임 혐의를 명확하게 한 것은 유죄 심증을 내비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로서 굳이 불리할 게 없다는 얘기도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법원도 전전긍긍=재판부는 “불분명한 부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공소장을 변경했을 뿐”이라며 적법한 과정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재판부가 이 회장 등의 공모 여부에 명백한 유죄 입증이 어렵고 전체적으로 무죄를 선고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허 씨와 박 씨의 의무 위반 부분을 강조하는 쪽으로 공소장 변경을 했으리라는 견해도 있다.

법원 수뇌부도 입지가 넓지 않다. 공판이 진행 중인 민감한 사건이어서 공판조서 작성이 적절하게 이뤄졌는지를 자체 조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공판조서 문제는 대법원이 강하게 추진해 온 공판중심주의의 핵심적 사안이어서 이번 사안을 그대로 방치하면 공판중심주의 쪽으로 불똥이 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장택동 기자 will71@donga.com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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