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지혜의 숲]영웅과 괴물

  • 입력 2006년 1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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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괴물’이라는 영화가 그야말로 괴물처럼 갑자기 나타나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용가리’류의 영화가 인기를 끌던 1970년대도 아니고, ‘고질라’와 같은 대형 스펙터클 블록버스터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런 영화가 만들어졌고 또 그렇게 인기를 끌었을까? 구성이나 줄거리가 그리 탄탄한 것도 아니고 구경거리도 할리우드 영화들에 비해 그리 대단하지 못했다. 물론 가족애에 호소했다든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한강에서 괴물이 출현한다는 의외의 발상, 괴물보다 더 괴물적인 국가조직이나 군대조직에 대한 우화화 등의 이유를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던 어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제작자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아닐까?

세상의 모든 괴물의 특성은 사납고 포악하다는 것인데, 모든 사나움과 포악함은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온다. 그러니까 괴물의 본질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영혼의 초라함에 있다. 자연은 가끔 방심하여 그런 괴물을 내놓을 때가 있는데, 그것을 물리치는 것이 바로 영웅이다. 영웅의 영혼은 괴물과는 정반대로 자신만을 사유의 중심으로 삼기에는 너무 넓기 때문에 항상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삼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처지를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느끼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들의 괴로움을 덜어주려고 노력한다. 희랍 신화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 같은 영웅들이 주로 하는 일이 괴물을 물리치는 일이다. 예수나 석가와 같은 도덕적 천재들, 즉 종교적 영웅들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도 자신의 이기심을 물리치라는 것이거나 심지어 자아 자체를 깨라는 것임을 생각하면 그들의 영혼의 크기가 괴물의 협소함과는 얼마나 대척점에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도 그런 영웅적이며 위대한 정신의 산물이다. 그것의 대상은 처음부터 우주 만물이었으며, 항상 부분적인 진실이 아니라 전면적인 진실을 추구했다. 소크라테스가 “네 영혼을 돌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영혼의 능동적 존재방식을 살피라는 의미인 동시에, 자신의 개인적 이기심에 사로잡혀 일신의 영달과 육체적 쾌락만을 좇지 말고, 인간으로서 전면적이며 진정한 선을 추구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철학사를 보면 꼭 그런 큰 영혼들의 철학만이 있는 것은 아니고, 세상을 허무로 돌리려는 허무주의나, 모든 것을 최소한으로 해체, 환원시키려는 해체주의나 환원주의, 또는 모든 것을 물질적 원리로 설명하려는 유물론 같은 초라한 정신들의 철학도 많이 있다. 아니, 많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도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여 보존의 철학과 해체의 철학이 대립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흔들리기 쉽고 연약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동서고금의 인류 역사를 살펴봐도 외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영웅이 있는가 하면 권력에 눈에 어두워 이웃나라를 괴롭히고 자기 백성이나 국민을 억압한 괴물같은 독재자들이 있었다. 멀리는 중국의 진시황제, 몽골의 칭기즈칸, 로마제국의 카이사르 등이 있는가 하면 가까이는 나치독일의 히틀러, 구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이 있다. 이들 중 누가 진정한 영웅이었고 괴물같은 존재였는지를 판별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시대의 평가와 보는 사람들의 이해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느 쪽인가를 판별하는 방법은 그가 과연 전체 국민을 위했는지를 보면 안다. 국민은 굶어죽는데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호의호식했다면 아무리 외형적 업적을 많이 남겼다 하더라도 진정한 영웅 대접을 받기는 어렵다.

영화 ‘괴물’이 수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삶과 의식을 짓누르는 ‘괴물’ 같은 존재에 대해 연약한 한 가족이 ‘영웅’처럼 대결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기 때문이 아닐까.

최화 경희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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